등록 : 2019.09.22 09:09
수정 : 2019.09.22 09:13
[토요판] 신지민의 찌질한 와인 12. 와인 선물 잘 고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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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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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추석 선물로 와인을 받았다며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있어 보이는 두툼한 상자에 와인 두 병과 오프너(이미 10개 넘게 있는)가 들어 있었다. 모두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와인이었다. 불안한 느낌이 나를 엄습해 왔다. “보르도 와인이 좋은 거라며? 그래서 이걸로 골랐대.” 아버지는 내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 눈치여서 차마 이게 바로 명절 때만 등장하는 ‘묻지 마 보르도 세트’라곤 말하지 못했다. 일단 마셔보자고 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포도주스에 알코올을 탄 것 같은, 한마디로 ‘정말 맛없는’ 와인이었다.
나만 이런 건가 싶어 와인 평가 앱인 ‘비비노’에서 이 와인들을 검색해봤다. 두 병 모두 6683원짜리라고 나왔다. 평점은 2.6이었다. ‘다신 마시지 않겠다’, ‘차라리 이 와인을 보드카에 넣어 마시고 싶다’는 평가들도 있었다. 아버지마저 “이거 맛이 왜 이래? 이래서 와인은 어렵다니까”라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아버지의 지인은 와인 선물세트를 사기 위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셨을 거다. 무엇을 사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판매 직원이 “추천해 드릴까요?”라고 말을 걸었을 것이다. 이때 뭐라고 대답하느냐에 따라 손님의 내공이 파악된다. 아마 그는 ‘가성비 좋은 와인’이나 ‘맛있는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와인에 대해 잘 모르니 적당히 알아서 추천해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이럴 때 판매 직원은 ‘묻지 마 보르도 세트’를 권유한다. “와인은 프랑스, 그중에서도 보르도 와인이 제일 유명한 것 아시죠? 보르도 와인은 원래 비싼데, 추석 선물세트로 저렴하게 나왔어요”라고 권유했을 것이다. 물론 보르도 와인이 유명하긴 하다. 하지만 명절 세트엔 ‘근본 없는’ 보르도 와인들이 수입사마다 한두개씩 등장한다. 바로 아버지의 지인 같은 분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와인 판매점에서 추천을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실패하지 않을까. 맛의 특성과 와인 산지, 품종 등 최소한의 취향과 가격대를 정해서 말하는 게 좋다. “5만원 이하의 떫은맛이 강한 와인을 추천해주세요”, “5만원대의 미국 까르베네 소비뇽 중에서 추천해주세요”처럼 말이다. 맛없는 와인을 팔겠다고 하는 판매 직원은 없고, 손님의 예산이 얼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성비’를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선물을 받는 상대의 취향을 전혀 모른다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1865’, ‘몬테스 알파’ 같은 ‘국민 와인’들도 무난하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온 와인 중에서 고르는 것도 방법이다. 와인을 건네며 <신의 물방울>에 나왔다고 ‘썰’을 풀면 누구나 눈을 반짝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병에 5만원인 와인보다는 5만원짜리 한 병, 두 병에 10만원인 와인보다는 10만원짜리 한 병을 좋아한다. 요란한 포장도, 무겁기만 한 상자도, 집에 수도 없이 많을 오프너도 필요 없다. 화려한 포장보다 와인을 고르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을 상대의 정성과 노력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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