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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1 19:24 수정 : 2019.10.11 19:29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 신지민의 찌질한 와인
13. 와인을 마시는 순서

게티이미지뱅크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마실 때는 어떤 순서로 마셔야 할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샴페인이나 카바 같은 스파클링 와인을 제일 먼저 마시고, 가벼운 와인에서 무거운 와인으로 간 뒤, 달달한 디저트 와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또는 음식의 순서에 맞춰서 어울리는 와인 순으로 마실 수도 있다. 음식도 가벼운 전채요리에서 생선, 육류 순서로 먹는 경우가 많아서 순서가 대체로 맞는 편이다. 만약 쉽게 마실 수 없는 비싼 와인이 등장한다면? 이 와인은 제일 먼저 마셔야 할까, 마지막에 마셔야 할까?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은 와인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일 것이다. 가장 비싼 와인이 주인공이 되는데, 대체로 이 와인은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비싸고 오래된 와인은 대체로 디캔팅(오래 묵은 와인의 찌꺼기를 제거해 투명한 와인을 얻는 작업)이 필요해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 비싼 와인을 마지막에 배치해야 기대감도 올라가고, 메인요리와 매칭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비싸고 유명한 와인을 마셔볼 기회가 있었다. 보르도 5대 샤토 와인 중 하나라거나, 샴페인계의 명품으로 통하는 와인을 누군가 이야기하면 “나 그거 마셔봤어!” 하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그 와인의 맛은 어땠냐”라거나 “정말 비싼 와인이 맛있냐”라는 질문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인공을 만나기 이전에 조연을 너무 많이 만난 탓에 취해버려 그 맛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와인을 마시는 순서를 바꿨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입각해 주인공부터 먼저 만나기로 했다. 특별히 음식과의 조화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만원이라도 더 비싼 와인을 먼저 마시는 거다. 이렇게 하니 취하기 전에 주인공을 만난 덕택에 그 와인의 맛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에 봉착했다. 와인은 열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코르크를 열자마자 마셔버리니 주인공의 진짜 맛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지막 잔을 마실 때쯤이야 그 진가가 드러났다. 또 주인공을 처음에 만나다보니 조연급은 되고도 남을 와인들이 엑스트라로 전락하는 결과가 나왔다. 알코올 보충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수준이 되면서 너무 맛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는 주인공의 등장 시점을 처음도 마지막도 아닌 중간 또는 중간보다 조금 앞으로 배치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그날 마실 와인을 전부 열어놓는다. 주인공이 몸을 풀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다. 그러곤 샴페인이나 카바 같은 스파클링 와인으로 흥을 돋우고, 가벼운 화이트 와인으로 미각을 일깨운 뒤 그날의 주인공을 만나는 거다. 주인공과 어울릴 음식은 미리 주문해놨다가 함께 마신다.

와인의 맛을 잘 기억하고 싶으면 중간중간 간단하게 기록을 하는 것도 방법인데, 취하기 시작하면 이조차도 귀찮기 마련이다. 그래도 하이라이트가 중간쯤에 있으면 그때까진 버틸 수 있다. 사실 술을 ‘적당히’만 마신다면 순서를 생각하고, 언제 마실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애주가에게 ‘적당히’는 없는 법! ‘적당히’ 마시는 그날까진 주인공의 등장 시점도 중요할 따름이다.

신지민 문화팀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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