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07 06:00
수정 : 2019.06.07 19:33
[책과 생각]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은 작가 조이스의 탄생을 알린 출발점이면서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단편소설집의 모범이다. 작가가 되거나 좋은 독자가 되려고 할 때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한 위상에 맞게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책을 구성하고 있는 15편의 단편 가운데 ‘이블린’을 비교해서 읽어보았다. 어떤 단편을 고르더라도 조이스의 솜씨와 성취를 느낄 수 있지만, ‘이블린’은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가진 유일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에블린’이란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다).
이 단편은 이블린이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녀’라고 지칭되지만 짧은 서술의 대부분이 이블린의 회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블린은 무능하면서도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생계를 위한 벌이와 살림을 맡아야 했다. “힘든 일이고 힘든 삶이었다.”(창비) 그녀에겐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두 어린 동생이 그녀의 몫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니스트와 해리로 불리는 두 남자 형제는 그녀의 오빠들로 보인다. 어린 시절에 어니스트만 빼고 공터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 여동생들”(문학동네)이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그녀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창비)이나 “처녀네 남매들”(민음사) 정도가 타당해 보인다.
어릴 때는 이블린이 여자아이여서 아버지가 해리와 어니스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찌검을 하지 않았지만 열아홉 살을 넘긴 지금은 수시로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어니스트는 죽고 해리는 일하러 지방에 가 있기에 그녀를 보호해줄 사람이 집에는 없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이블린을 괴롭히는 건 돈 실랑이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받는 봉급 전부를 아버지에게 내놓고 생활비를 타 쓰고 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을 낭비한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렇듯 힘들고 피곤한 삶에 지친 이블린에게 프랭크란 남자가 생긴다. “매우 친절하고 남자답고 속이 트인 사람”(창비)이라는 인상은 아버지와 다른 남자라는 뜻이겠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아버지의 반대로 두 사람은 몰래 데이트를 해야 했다. 선원인 프랭크는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자고 제안하고 이블린도 더블린의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왜 그녀가 불행해야 하나? 그녀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창가에 앉아 고심하던 이블린은 창밖으로 들려오는 손풍금 소리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을 떠올린다. 그녀의 어머니는 광기로 끝나버린 진부한 희생의 삶을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고집스레 되뇌던 말은 “데레본 세론!”으로 대략 ‘쾌락의 끝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어림할 수 있는 게일어다. 평생을 희생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살아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주문 같은 말이 다시금 이블린을 몸서리치게 한다. 어머니에게 약속한 대로 더블린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이블린의 인생 역시 어머니의 삶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포감에 질려 프랭크가 기다리는 부두로 간다. 하지만 그녀의 번민은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마비 상태가 된다.
조이스는 마지막 순간에 프랭크와의 탈출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이블린의 모습을 짐승에 비유한다. “묶인 짐승”(창비), “넋을 잃은 짐승”, “수동적이 되어 어찌할 바 모르는 짐승”(민음사), “미약한 한 마리 짐승”(열린책들) 등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시선에는 더는 사랑이나 이별, 혹은 어떠한 인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끝내 더블린을 떠나지 못한 이블린과는 다르게 조이스는 1904년 10월, 장래 아내가 될 노라 바너클과 함께 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아일랜드의 잡지에 ‘이블린’을 실은 다음이었다.
이현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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