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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01 17:12 수정 : 2019.07.03 15:34

길을 찾아서 8회-전쟁고아, 양민학살 그리고 대구

남산초교 때 전쟁고아 김태원과 절친
불쌍한 아이들 보며 ‘사회사업가’ 꿈

전쟁 직후 부친 경찰서 끌려가 ‘반죽음’
“빽없어 당했다…국회의원 되자 결심”
경북중 때부터 연습 ‘웅변대회’ 석권
60년 총선 때 ‘양호민 후보’ 찬조연설도

75년 부친 위독 소식에 귀국해 ‘임종’
평생 공포에도 ‘고문 이유’ 끝내 함구
“통일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 유언

미군·아군 ‘빨갱이 몰아 양민학살’
“서술 넘어 사회과학적 ‘설명’ 필요”
첫째는 트루먼 ‘기독교 선악관’ 영향
둘째는 미군정 ‘좌익 의심 건준 무시’
셋째는 이승만 ‘친일세력 이용’ 집권

길을 찾아서 8회-전쟁고아, 양민학살 그리고 대구
대구에서 한국전쟁과 학창시절을 보낸 박한식 교수는 아버지의 ‘빨갱이’ 수난을 겪은 영향으로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75년 별세한 부친은 그에게 ‘통일될 때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57~58년 경북고 교복 차림의 박 교수(뒷줄 맨 오른쪽)와 가족 사진, 부친(박영석·맨 가운데)·모친(이동수·앞줄 왼쪽 둘째)과 3남3녀 남매들, 큰매형과 조카들이 함께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회고해 보면, 내 인생을 강렬하게 지배한 두 가지 체험이 떠오른다. 하나는 전쟁고아였던 김태원이란 친구와 함께 지냈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님께서 경찰서에 끌려가셔서 모진 고문을 당하신 뒤 반죽음 상태로 돌아오신 모습을 목격했던 체험이다.

김태원은 북한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의사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말았다. 졸지에 전쟁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길가에서 혼자 울고 있던 김태원은 옆을 지나가던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그 미군은 김태원을 차에 태워 남한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대구의 고아원에 맡겼다. 그 고아원은 마침 내가 다니던 남산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이었다. 그래서 김태원을 쉽게 만나게 되었고, 또 그가 사는 고아원도 자주 가봤다. 대부분 수녀였던 보모들이 고아들을 보살펴주었지만, 어린 내가 봐도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고아들이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장래 ‘사회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김태원과 나는 경북중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여전히 몸이 약했던 나는 들것에 실려 입학시험 시험장에 들어갈 정도였다. 하지만 김태원은 덩치가 크고 건장했다. 우리는 굉장히 친했다. 훗날 커서 미국의 브로드웨이를 함께 걸어보자는 꿈도 키웠다.

박한식 교수는 ‘절친’이자 전쟁고아 출신인 김태원의 영향으로 사회사업가를 꿈꾸기도 했다. 사진은 김태원이 살았던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의 백백합보육원에서 한국전쟁 때 400명 원생들 김장 준비를 하는 모습. 사진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누리집 갈무리

전쟁고아였던 ‘절친’ 김태원의 영향으로 박한식 교수는 어릴 때 사회사업가가 되고자 마음 먹기도 했다. 1954년 대구 동인동 피란민촌의 아이들이 분유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한국전쟁 와중에는 경북대 교수가 경북중학교에 와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경북대에서 수학을 강의했던 이아무개 교수도 그중 한 분이었다. 나는 반장이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면 항시 우리 반 줄 맨 앞에서 교장을 등지고 서 있어야만 했다. 어느 날 교수가 출제한 시험을 봤다. 그런데 문제 중 하나가 ‘교장의 키를 어림짐작으로 적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답을 알아맞히지 못했다. 늘 100점을 맞던 나는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교수에게 따졌다. ‘문제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시면 교수님도 저의 키를 어림짐작으로 맞혀보시겠어요?’ 그런데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이 교수는 나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몸이 약했던 나는 이내 피투성이가 되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이 교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소리쳤다. 김태원이 주저 없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김태원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팼다. 나보다 훨씬 다부진 체격을 지녔던 김태원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1954년 대구에서 학생들이 미국의 원조를 환영하는 영문·한문 펼침막을 들고 거리 행사에 동원된 모습으로, 미국인 자원봉사자 애덤 유어트가 찍은 사진이다. 그 무렵 경북중에 다녔던 박 교수는 ‘나도 어디쯤 서 있을 법한 장면’이라고 기억했다. 사진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김태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김태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어떤 것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다. 김태원의 죽음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정말 똑똑하고 유능했던 젊은이의 목숨을 그토록 빨리 앗아가 버린 전쟁의 시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나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한때는 집에도 노래방을 꾸며놓았을 정도다. 지금도 김태원이 그리울 때면 종종 혼자서 조용필의 ‘친구여’를 부른다. 그러나 숨이 멎을 듯 목이 메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노래를 다 부르지는 못하곤 한다.

박한식 교수는 한국전쟁 전후 미군과 국군이 수많은 양민학살을 자행한 이유를 ‘설명’해내는 것이 학자로서 소명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6·25 때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다큐 <레드룸>의 한 장면.
한국전쟁 무렵은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전쟁유족회에서는 학살된 양민의 수를 약 100만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내가 특히 주목하는 학살은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다. 예컨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에서 반복적으로 자행되었다. 도대체 왜 미군과 국군은 적군이 아닌 아군의 양민을 그토록 대규모로 죽였단 말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적으로 자행된 양민학살을 단순히 ‘서술’(description)하는 것을 넘어 사회과학적으로 ‘설명’(explanation)하는 것은 한국 사회과학자의 시대적 사명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미군과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까닭으로는 보통 ‘빨갱이’라는 죄목이 제시된다. 빨갱이는 공산주의자의 속칭이다. 산속에 숨어 있던 빨치산이나 인민군이 야밤에 마을로 내려와 양민들에게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미군과 국군은 그런 양민을 모두 ‘부역자’로 간주해서 학살했다. 부역자는 곧 빨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양민학살은 전쟁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만주 시절 체험했던 국공내전만 해도 양민이 마오쩌둥의 인민혁명군에게 밥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그들을 학살하지도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28일 대구역 광장에서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가려진 역사 밝혀낸 진실>(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중에서
나는 미군과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까닭은 크게 3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해리 트루먼이 견지한 기독교의 선악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선악관을 보면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는 곧 ‘악마’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반드시 신의 이름으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트루먼이 견지한 기독교적 선악관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을 거의 멸종시킨 퓨리턴의 선악관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조선총독부를 꼽을 수 있다. 트루먼 행정부에서 한국에 파견한 존 하지는 미군정을 수행할 수 있는 효율적 행정수단으로 조선총독부를 선택했다. 여운형이 준비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는 ‘빨갱이’가 다수 포함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번째 요인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미국에서 찾았다. 한국에서는 권력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인 통제 노하우를 배웠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독종’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고문과 같은 방법으로는 어림없고 반드시 죽여서 모범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트루먼과 미군정의 시각에서 볼 때 인디언과 피부색이 유사한 조선인이 빨갱이까지 되었다면 결코 살려 둘 수 없는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선총독부에서 터득한 조선인 통제 방법을 과감하게 실천하면서 미군정의 이해관계에 적극 호응했다. 요컨대 한국에서 양민학살이 반복적으로 자행되었던 까닭은 트루먼의 기독교적 선악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통제 노하우, 이승만의 친미반공주의의 ‘삼자동맹’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1954년 미국인 자원봉사자 아담 유어트가 찍은 대구 동구 아양교 철교 부근의 이정표 사진. 박한식 교수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정책을 홍보하던 ‘너도나도 사랑하자 백두산 가는 길을’ 구호를 기억했다. 사진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한국전쟁이 격화되고 양민학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의 아버님도 빨갱이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 때 경북 청도에서 하얼빈으로 이민을 갔다가 해방 후 평양을 거쳐 대구에 정착하신 아버님의 삶의 역정 그 자체가 빨갱이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님은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 어머님과 누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님을 애타게 기다렸다. 저녁 무렵 경찰차가 우리 집 앞에서 정차했다. 이내 아버님을 마당에 내던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님의 모습은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버님의 모습을 본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주변 어른들에게 아버님께서 고문을 당하신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한결같이 ‘빽’이 없어서 그랬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어떻게 하면 빽이 생기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되면 빽이 생긴다고 말씀해 주셨다.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느냐고 또다시 물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되려면 웅변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되려던 꿈을 정치가로 바꾸었다. 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웅변 연습을 시작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발성 연습을 했다. 또한 국회의원의 연설 현장을 수없이 방문해서 그들의 연설 스타일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때 내가 본 연설 중에서는 이승만의 연설이 가장 형편없었다. 이승만은 우리말이 매우 어눌했다. 마치 외국 사람이 우리말을 배워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수많은 웅변대회에 참여해서 수없이 입상했다. 받은 상금과 상품은 모두 신문사에 기부했다. 나도 배가 고팠지만 김태원처럼 어려운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의 웅변 실력은 일취월장해서 마침내 대구에서 ‘웅변왕’으로 통했다. 훗날 양호민이라는 학자가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초빙을 받아 찬조 연설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 식의 찬조 연설을 아주 많이 했다. 웅변 원고도 모두 내가 직접 작성했다. 그런데 원고 주제는 모두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폭탄이 ‘일심폭탄’이라고 역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키는 134㎝였다. 그처럼 조그만 아이가 항시 전쟁과 평화라는 무거운 주제로 웅변 원고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깊은 ‘평화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대구의 웅변왕’을 소문난 덕분에 1960년 ‘7·29 총선’ 때 사회대중당 소속 민의원 후보로 나선 양호민(사진) 당시 대구대 교수의 유세 때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양 교수는 서울대 법대 교수와 <사상계> 주필을 겸하던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으로 해직된 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0년 7월23일 사회대중당의 부산 유세에서 창당을 주도한 윤길중 대표 등이 연설을 하고 있다. 진보계열로 대구·경북지역에서 선전했던 사회대중당은 61년 ‘5·16 쿠데타’로 해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조지아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받았다. 나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님과 나는 사흘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님의 병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도 했다. 아버님께서는 가장 먼저 만주에 계시는 조부님을 찾아 달라고 말씀하셨다. 평생 이산가족의 삶을 사셨던 아버님께서 이제 뜻을 이루시지 못할 것 같자 아들에게 부탁을 하신 것이다. 또한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통일되기 전에는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미국에 남아 통일을 위해서 헌신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나에게 유언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매우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님의 유언이 나로 하여금 미국에 머물면서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평화와 통일을 연구하는 삶을 살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IMAGE11%%] 아버님은 평생 공포에 시달리며 사셨다. 또한 평생 직장을 갖지도 못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변변찮은 일을 하면서 생활하실 수밖에 없었고, 어머님도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신 까닭을 나에게 끝내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나는 이제야 아버님의 깊은 속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버님에게 찍힌 빨갱이라는 낙인이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아버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신 그 뜻을 조금씩 헤아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다.

인간에게는 희생자에게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는 아주 못된 사유의 습성이 있다. 학술용어로는 ‘희생자 비난하기’라고 부른다. 전두환이 1980년 5월 그 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다음, 희생자에게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자신을 빨갱이를 때려잡은 애국자로 강변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만이 40년 가까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하지만 어찌 그뿐이겠는가? 한국에서 수백만명에 이르는 양민학살 유족들이 나의 아버님처럼 한 많은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그처럼 기가 막힌 기만이 어떻게 우리의 사유를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강고하게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학자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꾸준히 안내하는 것, 학자의 ‘존재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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