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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7 22:12 수정 : 2019.10.10 10:53

15회-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

1965년 11월 퀘이커교도 노먼 모리슨
국방성 앞 분신자살로 ‘반전운동’ 발화
“충격에 분신 현장 달려가 깊은 상념”

대학교수들 ‘반전이론’ 설파하며 주도
미네소타대학원 시블리 교수 대표적
“4·19 경험 살려 ‘반전’ 대열에 동참”

미군들 대학 들어와 직접 진압 ‘경악’
1970년 5월 총격 사망 ‘켄트대 학살’

200만 양민학살·생화학무기 사용 등
‘목적·과정·결과’ 모두 부당한 전쟁
‘전쟁’ 대신 ‘내전’ 용어조작으로 인정

8년간 미군 50만명 보내 5만8천명 전사
‘참전하면 죽는다’ 청년들 병역기피 열풍
박정희 ‘한국군 파병’ 제안에 존슨 환영
‘미군 베트남 이동에 북한군 침략’ 이유
“동아시아 공산화 도미노이

15회-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

박한식 교수는 1965년 미국 유학 직후부터 베트남전쟁과 반전운동으로 이어진 미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정당성 없는 전쟁의 폐해를 실감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16일 전용기까지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해 국빈 대접을 하면서 한국군 사단 규모의 파병을 요청했다. 그때 박정희는 워싱턴 도착 카퍼레이드에 이어 5월18일 뉴욕 맨허튼에서도 브로드웨이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 세례를 해주는 환영을 받았다.(왼쪽 사진)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 첫 전투병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파병으로 화답했다. 그해 10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파월 장병 환송식’에서 아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의 슬픈 표정을 포착한 사진기자 정범태씨의 ‘파월’. 사진 국가기록원, <정범태사진집>에서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11월2일, 31살의 퀘이커교도 노먼 모리슨이 미국 국방성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모리슨이 1살짜리 막내딸 에밀리까지 껴안은 채 분신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달려들어 에밀리는 빼앗아 왔다. 모리슨은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집무실에서 쉽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를 선택했다. 베트남전쟁 반대의 메시지를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를 뒤로하고 선택한 모리슨의 죽음은 미국 전역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반전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1965년 11월 워싱턴 펜타곤 입구에서 시민들이 ‘베트남전쟁 반대’ 분신자살한 노먼 모리슨을 추모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도 그때 분신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현장이다. 사진 ‘워싱턴포스트’
나도 충격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1965년 3월 워싱턴에 도착한 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질주하던 내 삶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발길은 그의 분신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리슨이 사라진 그 현장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깊은 상념에 빠지게 했다. 모리슨의 분신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미국을 따라 대규모 한국군을 파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한국군 파병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1965년 11월 워싱턴의 펜타곤 앞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분신자살로 반전운동을 발화시킨 노먼 모리슨(왼쪽)은 세 아이를 둔 31살의 젊은 가장이자 퀘이커 교도였다. 사진 <에이피>(AP)
1965년 11월2일 노먼 모리슨은 1살짜리 막내딸을 품에 안고 분신을 시도해 더 큰 충격을 줬다. 그날 저녁 부인 앤 모리슨이 주위 시민들에 의해 구조된 딸을 데리고 볼티모어의 집으로 가고 있다. 사진 <에이피>(AP)
전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국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미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침략하지 않았지 않은가? 더욱이 미국은 ‘베트남전쟁’(Vietnam War)이란 용어 대신 ‘베트남내전’(Vietnam Conflict)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를 갖지만, 베트남내전은 미국이 단순히 남베트남을 도와주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용어 조작은 미국 스스로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는 미국이 오랫동안 ‘한국전쟁’(Korean War) 대신 ‘한국내전’(Korean Conflict)을 선호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미국 역사에서 한국전쟁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미국 스스로 한국전쟁의 정당성을 부인한 셈이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다. 1940년부터는 일본의 식민 지배도 받았다. 그러다 제2차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프랑스와 일본이 철수하면서 베트남에 권력 공백이 생겼다. 호찌민은 1930년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설립하고, 1941년 베트남에 잠입해 결성한 월맹(베트남독립동맹)을 중심으로 해방운동을 전개했으며,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을 지원해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으로 앉혔다. 베트남이 분단된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부정부패와 정통성 위기에 시달리다 1963년 11월2일 암살되었다. 같은 해 11월22일에는 존 케네디도 ‘댈러스 피격’으로 암살당했다. 그러자 소련은 베트남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호찌민에게 대규모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이에 케네디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1965년부터 베트남에 대규모 미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미-소 대리전쟁(proxy war)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총 50만명을 파병했고, 5만8315명을 전사로 잃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군이 약 200만명의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고, 무엇보다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생화학무기까지 썼다는 점이다. 물론 낮에는 농사를 짓다가 밤이 되면 게릴라 활동을 하는 베트남인이 많았기 때문에 양민 학살의 불가피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국이 백인에게 생화학무기를 쓴 적은 없다. 오직 유색인종에게만 생화학무기를 썼다. 인디언전쟁에서도 그랬고, 한국전쟁에서도 그랬다. 이런 현상은 미국의 ‘유전자’(DNA)에 인종주의가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던 까닭도 인종주의를 빼놓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은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하기 이전인 1962년부터 71년까지 북베트남 정글 고사 작전에 따라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맹독성 다이옥신 화합물(고엽제)을 약 8천만 리터 살포했다. 사진 베트남 전쟁박물관

베트남전쟁 동안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해 지금도 수백만명의 베트남인 뿐만 아니라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3세·4세까지 유전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엽제로 황폐화된 베트남 가마우지역 고사목 지대를 1976년 어린아이가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고 있다. 사진 베트남 전쟁박물관
베트남전쟁 동안 티브이에서 날마다 ‘공지’하는 전사자 수는 참전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미국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자 젊은이들 사이에서 병역기피 열풍이 일어났다. 미국은 약 1600만명의 청년에게 징집 영장을 보냈지만 겨우 50만명 정도만이 응했을 뿐이다. 수많은 미국 정치인 자녀가 병역을 기피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도널드 트럼프, 빌 클린턴, 아들 부시, 딕 체니, 존 웨인, 무하마드 알리 등등 지도층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다. 약 4만~5만명이 캐나다 등지로 도피 유학을 떠났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대학 졸업 때까지 징집을 연기해주던 기존 정책을 확대해서 대학원 졸업까지로 연장했다. 그 결과 너도나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여파로 평소 2 대 1 정도였던 대학원 진학 경쟁률이 7 대 1로 폭증했다. 내가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도 16명을 뽑는 데 수백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반전 시위는 대학에서 주도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한국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닐까?” 내가 서울대 시절 앞장섰던 ‘4·19 시위’ 방식과 영락없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한국에서 4·19 시위는 경찰이 진압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군대가 대학 캠퍼스까지 치고 들어와 무력으로 탄압했다. 예컨대 1970년 5월4일 미군은 켄트주립대학에서 반전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 학생 4명이 죽었고, 9명이 다쳤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군사문화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친숙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박한식은 1965년 유학 직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지켜보면서 1960년 ‘4·19’와 비슷한 학생들의 시위 방식과 경찰이 아닌 군대가 직접 시위를진압하는 사실에 놀랐다. 1970년 5월4일 미 오하이오주 방위군이 켄트주립대 교정에 진입해 반전시위대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

1970년 5월4일 오하이오 주방위군의 총격으로 4명의 학생이 숨진 ‘켄트대의 학살’ 현장.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친구를 보며 절규하고 있는 학생을 찍은 사진은 그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
1970년 ‘켄트대의 학살’은 번져가던 미국내 반전운동에 충격과 함께 기름을 부었다. 대학생들이 ‘왜 4만8천여명의 미국인과 4명의 학생이 죽어야 했냐’는 팻말을 들고 켄트대 학살을 항의하는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
그뿐 아니다. 한국 교회는 대체로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을 적극 옹호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퀘이커교도를 위시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반전운동을 적극 펼쳤다. 또한 4·19 때는 대학교수들이 시가행진 등을 하기는 했지만 앞장서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많은 대학교수가 최고급 수준의 반전 이론을 설파하면서 반전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예컨대 내가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미네소타 대학의 정치철학 교수, 멀포드 시블리는 ‘정의의 전쟁’ 시각에서 반전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한 것으로 유명했다. 4·19 현장에서 시위 실력을 충분히 연마했던 나도 시블리와 함께 베트남전쟁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IMAGE11%%] 전쟁은 목적·과정·결과에서 모두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먼저 전쟁의 목적이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 수행한 베트남전쟁은 사람을 살상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전쟁 과정도 공정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고, 심지어 생화학무기까지 썼다. 전쟁 결과는 역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일 뿐이다. 요컨대 베트남전쟁은 모든 단계에서 정당성을 잃은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마침내 끝났다. 지미 카터는 1977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베트남전쟁 참전을 기피한 모든 젊은이를 일반사면해주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IMAGE12%%] 그런 베트남전쟁에 박정희는 대규모 한국군을 파병했다. 미국은 1500만명 이상의 젊은이가 병역을 기피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병력을 ‘수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제일 먼저 응했다.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모두 32만명을 보냈고, 5099명의 전사자를 냈다. 한국의 파병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파병한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쪽에서는 파병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한국을 전혀 침략하지 않은 베트남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베트남 참전 명분을 ‘한국의 안보’로 내세웠다. 그 시절 초등학생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맹호부대 참전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박정희는 1967년 대선 유세에서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했다. 요컨대 맹호부대 참전 노래 가사는 그때 미국이 선전한 ‘도미노이론’, 즉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아시아 전역이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는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도미노이론은 동아시아의 구체적인 정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많은 미국의 지성인·대학생·기독교인 등이 도미노이론을 몰라서 그토록 치열하게 반전운동을 전개했겠는가?

박정희가 원한 것은 결국 ‘돈’이었다. 한국군 파병으로 벌어들인 총수입은 약 2억3556만달러로 집계됐다. 총수입의 약 80%인 1억9511만달러가 한국 정부에 송금되었다. 한국은 그 돈을 경제개발 자금으로 썼다. 물론 나는 그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한국 젊은이의 삶을 가볍게 평가할 생각도 전혀 없다.

[%%IMAGE13%%] 그러나 박정희는 한국 젊은이를 희생시킨 돈으로 경제개발을 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나는 꽃다운 한국 젊은이의 목숨과 돈을 바꾸는 행위의 정당성을 도저히 찾기 어렵다. 돈을 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과연 그때 한국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가? 국제금융기관에서 차관을 받고 각종 외교 활동 등으로 정당하게 돈을 벌 수는 없었을까?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진 까닭은 자국민에게서 전쟁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도 정당성이 그처럼 중요한데 경제행위의 정당성을 묻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본다.

나는 갈수록 물신주의로 전락하는 미국 민주주의를 ‘머니톡크러시’(Moneytalkcracy·When money talks, people listen)라고 이름지었다. 오늘날 미국은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돈이 곧 종교의 성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돈이 말하면 사람들이 듣는다’. 내가 볼 때 한국 민주주의 역시 머니톡크러시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나는 묻고 싶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이른바 ‘베트남 특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가?

트럼프와 문재인은 연일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주문한다. 이어서 핵을 포기하면 북한의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북한은 기회의 땅이니 경제적으로 잘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햇볕정책도 마찬가지 얘기였다. 미국과 한국의 영혼이 머니톡크러시에 빠져 있다 보니 북한도 돈을 얘기하면 자기들처럼 들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 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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