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약 1년 만에 문재인 정부의 세 바퀴 사회경제 패러다임의 앞길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집권 2년이 다 된 지금 재벌 지배-부채 주도 성장으로 역주행하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정부가 자기 페이스를 잃고 재벌과 관료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있는 듯하다.
이병천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강원대 명예교수
백년 전 선열들이 피 흘린 3·1혁명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났다. 임시정부는 아시아에서 선구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선포했다.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아니라 인민이 헌법 제정 권력으로 출현한 것이다. 백년 후를 사는 우리 민주공화국 시민은 이 혁명과 임시정부, 헌법가치의 계승자이다. 민주공화국이 겪어온 모진 풍상을 생각하면서 특히 세가지 헌법가치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인민주권의 가치다. 임시헌장이 선포한 민주공화제는 백년 동안 불변의 헌법 제1조로 유지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인민주권은 당연히 주권자에 대한 공권력의 엄중한 책임과 권력을 사유화하는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포함한다. 둘째, 균등의 가치다. 이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 균등, 경제 균등, 교육 균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헌헌법 이래 우리 헌법 전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균등 이념을 밝히고 있다. 셋째, 사회정의와 공공복리의 가치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쓰고 있다(84조). 또 재산권을 보장하되 “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23조).
그러나 인민주권과 주권자에 대한 공권력의 책임,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균등, 사회정의와 공공복지를 위시한 민주공화국의 기본가치는 심각하게 유린되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의 합작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는 그 최신의 국면이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문재인 ‘3기 민주정부’는 공권력의 무책임,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지대 수탈이 시대 문제로 부각된 오늘날 더욱 절실해진 공화국의 이 세가지 기본가치를 구현해야 할 무거운 책무를 지고 있다.
그간의 경과를 돌아볼 때 냉전반공체제가 본격화됨으로써 국가보안법이 헌법 위에 군림해 기본가치에 근본적 족쇄를 채웠다. 6·25전쟁 전에 이미 이승만 정권의 공작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신생 민주공화국의 국론이 분열되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은 해방 전후와는 전혀 딴판의 냉전반공국가로 탈바꿈했다. 극우적 냉전반공분단 체제 아래 ‘국가안보’는 남북 간 대결뿐 아니라 ‘빨갱이’로 지칭되는 ‘내부의 적’에 대한 가혹한 배제와 억압을 의미했다.
이승만 이후 대한민국 60년사는 대결, 배제, 억압을 무기로 삼아 구체제를 보수하려는 세력과 구체제를 깨트리려는 민주진보 세력 간의 다툼이 연출하는 진자운동으로 나타난다. 이 동안 우리는 박정희가 주도한 반공개발독재 또는 반동적 근대화의 시간, 5월 광주학살의 주모자 전두환이 주도한 신군부독재 시간, 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와 김영삼이 주도한 신보수개혁의 시간, 1997년 외환위기 후 김대중·노무현이 주도한 민주주의, 시장자유주의, 생산적 복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가 불안하게 병행 발전한 자유-복지-평화주의 시간, 그리고 이명박·박근혜가 주도한 신권위주의, 규제완화, 남북 대결주의가 병행 발전한 퇴행적 ‘불량국가’ 시간을 겪었다. 그리고 2016년 촛불항쟁의 힘으로 문재인 3기 민주정부의 시간이 도래했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촛불정부로 자임하며 모든 특권과 반칙, 불공정을 일소하고 차별과 격차를 해소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촛불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가 탄핵되었을뿐더러 냉전반공주의 구체제 위에 군림하며 오랜 지배력을 굳혀온 수구보수정당의 위상이 크게 무너졌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사에서 드물게 찾아온 민주, 복지, 평화 세 축이 공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주적 평화복지국가로 가는 시대교체의 책임을 지고 출범했다. 이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세 축으로 하는 세 바퀴 경제를 경제정책기조로 내걸었다. 이는 반세기 이상 우리가 매달려온 재벌 지배-이윤 주도 불균형 성장전략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부채 주도 성장전략을 대체하는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획기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사회정책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이런 까닭에 정부가 노동 존중 사회를 내걸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파격적 정책을 제시한 것, 그리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세 축으로 폭넓은 가계소득 증대 정책, 각종 가계생계비 경감을 비롯한 지출비용 경감 정책, 사회복지 확대 및 고용안전망 확충 정책을 제시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약 1년 만에 문재인 정부의 세 바퀴 사회경제 패러다임의 앞길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집권 2년이 다 된 지금 재벌 지배-부채 주도 성장으로 역주행하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터놓고 말하면 정부가 자기 페이스를 잃고 재벌과 관료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있는 듯하다. 이 와중에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30%대를 회복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까지 들린다. 무슨 까닭일까. 촛불정부를 자임했고 민주공화국의 기본가치를 새롭게 구현할 책무를 가진 새 민주정부의 깃발이 이토록 쉽사리 꺾이다니. 안이했던 탓일까. 구체제의 중압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사회경제개혁의 실패와 민심 이반이 수구 보수를 부활시키고 한반도 평화의 길까지 가로막을까 두렵다. 여기서 세세한 논의를 할 수는 없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과 물음을 던지고 싶다.
지난날 냉전반공주의 정권은 단지 대결, 배제, 억압만 일삼은 것은 아니고 나름의 대중 포용 전략으로 지배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으로 상당 정도 물적, 인적자산의 평등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 역사적 기반 위에서, 재벌에 거대한 특혜를 주며 재벌공화국의 초석을 닦았지만 재벌의 고삐도 잡아 압축성장 궤도로 유도하는 ‘지대활용 성장전략’을 추구했다. 그래서 박정희 시대에 공유성장이 실현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런데 민주화시대 역대 개혁정부는 균등과 사회정의, 소득주도성장이 공진하는 한국형 민주적 자본주의의 어떤 성공모델을 실현했나? 문재인 정부는 권력을 재벌에 넘겨준 참여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저성장과 불평등, 모두 건물주가 되려 하는 지대 추구 사회의 악순환을 넘어설 어떤 좌표를 가지고 있나? 흔들리고 있는 3기 민주정부의 책임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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