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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6 16:18 수정 : 2019.05.17 09:38

이병천
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강원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역대 정부 중 후대 정부에 본보기가 되는 정부, 하루하루 고단하게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민주공화국 시민의 푯대를 제시하는 정부, 재벌에 포획된 채 정경유착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재벌을 길들여 공화국의 시민기업으로 마땅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케 하는 강력한 민주정부, 그렇게 나라다운 나라를 이끄는 정부가 있는가?

나는 늘 책임있게 응답하고 확실한 줏대를 보여주는 시민의 정부를 원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런 정부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 기억에는 재벌의 고삐를 잡기보다 무력하게 재벌에 포획된 채 규제완화 나팔수가 되고 정경유착 놀이에 정신 팔린 정부가 많았다. 서민 대중에 등돌리며 재벌의 낙수효과나 구걸하라고 떠벌린 정부가 많았다. 그러는 사이 낙수효과마저 말라붙었다.

희대의 국정농단을 자행한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탄생해 촛불정부의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는 이 정부가 드디어 시작과 끝이 모두 좋은 시민정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얼마나 좋은 기회였나. 수구보수 대통령이 탄핵되었을뿐더러 냉전반공 분단체제에 기생해왔던 수구보수 정당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삼성 이재용을 비롯한 비리 재벌 총수들이 기소되는 등 코너로 몰렸다. 반면 새 정부의 각오에 믿음직한 구석이 엿보였다. 그런데 집권 2년 동안 사회·경제개혁에서 이 정부는 무엇을 보여주었나. 집권 2년이면 보여줄 건 거의 다 보여준 셈이다. 결과는 큰 실망이다. 촛불정부에서 촛불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촛불정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가계소득을 새로운 성장 원천으로 활용하는 소득주도성장, 일자리-분배-성장의 선순환을 복원하는 일자리중심경제, 경제주체 간 합리적 보상체계를 정립하고 대-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하는 공정경제, 그리고 3% 성장능력을 갖춘 경제를 유지한다는 혁신성장의 네바퀴 경제정책,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을 이루는 사람중심경제 정책을 제이(J)노믹스의 핵심기조로 내걸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인천공항 비정규직을 찾아가 손잡으며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 외쳤다.

제이노믹스 2년의 현실은 어떤가. 그 실상인즉,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최저임금 인상으로 옹색하게 가져가 약자들끼리 다투게 했을뿐더러 노동존중사회 약속에서 뒷걸음치기(ILO 핵심협약 비준 건을 경사노위에 넘기기를 포함해서), 공정경제개혁의 핵심에 해당하는 재벌개혁 및 경제력 집중 해소 과제를 재벌 자율에 맡겨 재벌 비위 거슬리지 않기, 공정경제?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의 길 모두에 필수 관문인 부동산 개혁(가장 준비가 부족했다), 자산불평등 개선 및 주거권 보장 과제를 부채주도성장 및 건물주 이해를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기, 조세 및 재정 정책의 경우 감세 및 재정보수주의 기조를 유지하는 선에서 안정적으로 조정하기 등으로 크게 변질되었다. 그러면서 중심기조가 박근혜 때 줄푸세-창조경제를 연상케 하는 규제완화-혁신성장으로 바뀌었다. 이는 네바퀴 정책이 가져올 높은 길에서 탈선하면서 찾은 상투적 선택지일 수 있다. 마침내 대통령이 손잡은 상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국정농단사건과 관련해 뇌물죄 혐의로 대법원 선고를 앞둔 삼성 이재용으로 뒤바뀌었다. 제이노믹스의 변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장면이다.

역대 정부를 돌아보면 대개 1년이 못 돼 궤도를 갈아탔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경제민주화 약속이 대선 승리에 큰 몫을 했지만 집권 후 창조경제를 제1조로 내세우고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확립’을 하위전략으로 삼았다. 집권 6개월 시점 ‘8·28 청와대 재벌총수 회동’을 분기점으로 줄푸세 정책을 전면화하고 재벌과 밀월에 빠졌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 및 국정농단 사태로 가는 비극의 씨가 뿌려졌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출범 6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 방미를 분기점으로 기조 변화를 보였다. 8·15 경축사를 통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구호를 내걸며 보수적 정책 선회를 분명히 했다. 원래 삼성이 제시한 구호였다. 나중에 노무현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더 오래 버텼다고 할까. 그게 위로가 될까?

네바퀴로 가는 사람중심경제를 세워 촛불정부 소임을 다하겠다던 개혁정부에서 국정농단 삼각축의 하나인 삼성 이재용과의 밀월로 안착하고, 단기성장률 관리에 급급한 관리정부 모습으로 주저앉기까지 세차례 변곡점이 있었던 듯하다. 첫번째, 집권 1년이 되는 2018년 7월 무렵이다. 6·13 지방선거 후 뭔가 담대한 개혁이 나올 거라는 기대에 응답은커녕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협소해진 상태에서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홍장표 경제수석이 물러나고 문 대통령이 인도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손잡았다. 두번째, 같은 해 12월 경제수장이 홍남기 부총리로 교체되고 2019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한 때다. 출범 때와 전혀 다르게 공식정책기조에서 규제완화를 앞세운 재벌주도 성장, 혁신성장을 선언한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기념 특별대담을 세번째 변곡점으로 꼽을 만하다. 대통령은 삼성 이재용과의 만남에 대한 시민사회 비판을 일축했다. ‘상투적’ 비판을 하지 말라고,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재판은 재판, 경영은 경영, 경제는 경제”라는 것이다. 적폐청산 수사는 앞선 정부가 시작한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 경제가 거시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뒀다는 말도 했다. 내 눈에는 분명히 삼성 이재용과의 ‘밀월’로 보이는데 대통령은 상투적 비판, 이분법적 시각이라고 반박한다. 글쎄, 대통령의 말씀이야말로 ‘상투적‘ 언사는 아닌지. 대통령의 일정은 그 자체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모를까. 알면서 그럴까. 상투적 언사는 “경제패러다임 전환의 성과가 나타났다”며 “다만 (이런저런)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쓰고 있는 정부의 평가문서에서도, 문재인-이재용 회동이 “개혁 의지의 후퇴가 아니라 혁신성장을 위해 산업정책적 노력의 일환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강변한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사회·경제개혁 평가에서 집중적 비판을 받은 대목이 공정경제개혁의 심각한 결핍이었고 이것이 네바퀴 경제 전반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었는데, 김상조 위원장은 이걸 모르는 걸까.

문 대통령은 “재판은 재판, 경제는 경제”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정부에는 아직 3년이 더 남아 있다. 이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정부에 시급한 것은 레토릭으로 끝날 수도 있는 거창한 “포용적” 미래 비전보다 상투적 치장을 벗고 초심을, 진정성을 되찾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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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이병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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