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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5 18:04 수정 : 2019.09.05 20:00

아베노믹스는 동반성장이나 소득주도성장에서 제이(J)노믹스를 훨씬 앞섰다. 극우 포퓰리스트 아베와의 싸움은 간단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는 경제와 나라의 길 찾기에서 문재인 정부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재용의 뇌물죄를 적시한 대법원 판결과 함께.

이병천
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강원대 명예교수

한-일 갈등 관련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대법원 판결이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불법성 및 이와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정면으로 적시하고,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위자료 청구권을 갖는다고 함으로써 과거사 문제를 푸는 새 분기점이 만들어졌다. 아베가 고노처럼 식민지배 전범국가로서 자국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할 줄 아는 한가닥 정치적 양심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불행히도 그는 평화국가 조항인 헌법 9조의 개헌을 통해 일본을 다시 전쟁국가로 만들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다. 아베가 도모하는 길은 우리가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의 길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아베는 사죄는커녕 적반하장 격으로 무역을 정치보복의 무기로 삼았다. 일본 정부는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규제와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배제 등 경제보복 전술로 치고 나왔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명령 및 위안부 합의 파기에 대한 정치보복임에도,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신뢰 관계가 붕괴됐다거나 한국의 수출과 관련해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했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수출규제가 얼마나 파괴력을 발휘하는지, 한국이 어떻게 비틀대는지를 살피는 ‘저강도 복합전술’이다. 전체 대일 무역적자에서 소재·부품 산업의 비중은 60%에 이른다. 화학물질 및 화학제품, 전자부품, 일반기계부품의 비중이 가장 크다. 우리 정부도 화이트국가 제외, 지소미아 종료로 응수했다.

일본은 한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아프게 때렸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사실 자국 경제에도 자해적일뿐더러 자유무역질서를 위협하고 글로벌 공급사슬을 교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의 한-일 갈등은 과거사 문제에 극적 타결이 없는 한 쉽게 끝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아베의 교활한 저강도 복합전술에 말려들지 않도록 전술적 차원에서 지혜롭게 대처해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기적 공급안정책을 넘어 지금까지 조립중심형-대일의존형 산업발전 방식, 국제 분업의 자리매김 방식, 수출과 내수의 불균형 발전, 재벌대기업 지배하 폐쇄적이고 약탈적인 생태계 안주, 위험의 외주화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갈등을 계기로 삼아, 더 넓게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분출되고 있는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흐름과 글로벌 공급사슬 변화를 직시하면서 다시 우리 경제의 새 길 찾기에 나서야 할 때다. 초유의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전화위복의 축적의 새판 짜기, 그 돌파구는 어디에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74주년 8·15 경축사에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경제’, 남북이 상생협력하는 ‘평화경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우리 경제 구조를 포용과 상생의 생태계로 변화시키고, 대·중소기업과 노사의 상생협력으로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겠다고 했다. 아베를 제치는 한국 ‘촛불정부’의 문명적 선진성을 나름 잘 보여준 발언이다. 좀 더 구체적인 대책은 정부가 “가마우지 경제를 펠리컨 경제로” 바꾸겠다며 내놓은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8월5일 발표)에서 볼 수 있다. 그 대책인즉 이러하다.

첫째, 소재·부품·장비 강국 도약을 통해 제조업 르네상스를 실현한다는 비전이다. 둘째,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6개 분야에서 100개 핵심품목을 선정해 수급 위험이 큰 20개 품목은 1년 안에, 자립화에 시간이 걸리는 나머지 80개 품목은 5년 안에 공급안정을 이룬다는 목표다. 셋째, 80개 품목에는 7년간 연구개발(R&D) 등 약 7조8천억원(매해 1조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대책의 규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넷째, 경쟁력 제고 전략으로 수요-공급기업 및 수요기업 간 수직적·수평적 협력모델 구축 지원하기, 기업맞춤형 실증·양산 테스트 베드 확충하기 등을 제시했다. 다섯째, 금융·세제뿐만 아니라 공정거래 측면에서도 특혜적 지원 제도를 마련하며, 노동·안전·환경·입지 등 사회 분야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

제조업 르네상스의 기치 아래 제시한 정부의 이 ‘8·5 소재·부품·장비 대책’은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경제’를 만듦에 있어 참신함과 함께 큰 빈틈, 나아가 위험도 보인다. 8·5 대책은 1980년대 중엽~후반에 진행됐던 부품·소재 및 기계류 국산화 정책 이래 최대 규모의 야심찬 정책인 듯하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도 2001년부터 부품·소재 발전계획이 추진되었고 성과도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2001년 이래 19년간 소재·부품 산업 지원 규모가 5조4천억원임에 반해 김대중 정부 5년간 벤처 지원 규모가 1조9천억원(창업자금만)인 것만 봐도 정책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하다. 김대중 시기에는 미국식 신경제를 롤모델로 삼음으로써 ‘한국산업발전의 경로 이탈’(이정동)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문재인 정부의 8·5 대책(및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과 전략)은 이 경로 이탈을 정상화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몇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 국산화에 성공한다 해도 상당 기간 품질은 일본 제품보다 못할 것이다. 불화수소 순도 99.99%와 99.99999999%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한다. 이 문제의 해법은 어떠한가. 국산품 사용을 강제할 것인가. 또 중소중견기업의 개발품을 수요 대기업이 받아주지 않거나 비용 절감만 강요하면 어쩔 건가. 지혜로운 복선형 산업화 및 규율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 재벌 대기업 지배 아래 폐쇄적이고 약탈적인 기업 및 산업 생태계를 개방적이고 공정한 상생협력의 생태계로 재구축하는 대책이 희미하다. 재벌 총수를 불러 대책을 세운 모양새나 국정농단 주역인 삼성 이재용을 비롯해 재벌들과 ‘밀월’ 행보를 해온 경과로 볼 때, 8·5 대책은 재벌한테 퍼주면서 약탈·폐쇄적 생태계를 재생산할 공산이 매우 크다. 이 합리적 의심에 대한 대답은 어떤 것인가.

■ 더 큰 문제가 있다. 박상준은 <불황탈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반수 이상의 일본인이 아베 수상이 추진하는 개헌에 반대한다. 다른 한편 과반수 이상의 일본인이 아베의 경제정책을 지지한다.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여성의 지위 향상, 근로시간의 단축,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공정거래 등과 관련해 일본의 보수정당은 한국의 진보정당이 주장할 만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동반성장이나 소득주도성장에서 제이(J)노믹스를 훨씬 앞섰다. 극우 포퓰리스트 아베와의 싸움은 간단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는 경제와 나라의 길 찾기에서 문재인 정부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재용의 뇌물죄를 적시한 대법원 판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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