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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7 18:11 수정 : 2019.11.08 02:06

2016년 촛불항쟁으로 박근혜가 물러나고 촛불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국 사회는 새로운 무엇을 얻었나. 정권 교체로 대한민국의 개혁 행보에 어떤 새로운 돌파가 있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난 듯하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게 된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고, 정의로운 전환은 지체되고 있다. 자기 실력보다는 주로 상대의 실책으로 득점을 얻는 거대 양당 주도의 공생정치, 보수 권력이 재벌 및 부동산·금융 부자와 손잡고 밀고 가는 다중적 불평등·불공정 체제, 이 속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루하루 불안정한 삶의 나날을 꾸려가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에는 큰 변함이 없다. “해 질 무렵이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고 토로한 ‘82년생 김지영’의 아픔이 우리를 울린다.

알고 봤더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가 1 대 99 식의 단순명쾌한 균열이 아니라 계급·계층적 특권이 능력주의와도 결탁해 구조적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20 대 80의 복잡한 균열 구도라는 사실, 경제자본과 교육자본이 교묘하게 손잡은 새 얼굴의 신세습 특권체제임을 깨닫게 된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커졌다. 광장을 뒤덮은 분노한 시민들의 엄청난 거리 정치에도 불구하고, 우파 포퓰리즘이나 좌파 포퓰리즘 모두가 차단된 한국 정치의 독특한 성격과 구도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 구성에는 냉전 반공주의 적폐에다 각자도생의 시장주의가 겹쳐 있다. 20 대 80의 균열체제를 극복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이제 어떤 동력으로, 어떤 공간에서 이 일이 가능할까.

재기하기 어렵게 보였던 적폐정당이 되살아났는데 이는 풀어야 할 큰 수수께끼다. 자력으로는 어려운 재기다. 박근혜의 자충수로 현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득점한 데 이어 상대방 실패로 득점한 대표적 케이스라 하겠다. 그러나 개 버릇 남 못 준다. 적폐정당의 이런 못된 버릇이 다시 민주당을 도와주니 거대 양당 공생정치의 절묘한 반복이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허무한 약속이었다. 조국 사태 이전에 ‘평등 공정 정의’의 약속은 진작 깨어져 나갔고 촛불은 가물가물해졌다. 조국 사태로 정부는 다시 촛불의 빛을 잃었다. 검찰 개혁을 위한 안이한 인사, 조국과 윤석열이 ‘환상적 조합’(!)이 될 거라고 본 야무진 꿈이 촛불정부로서의 민주적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사건으로 비약했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역습이다. 일종의 ‘공정의 역습’ 사태다.

조국 사태를 겪고서야 집 나갔던 공정이 다시 문재인 정부의 국정 중심가치로 되돌아왔다. 역설적 효과다.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이 가장 힘주어 언급한 가치가 공정이었다. ‘공정이 바탕이 돼야 혁신도 있고 포용도 있고 평화도 있을 수 있다’면서 공정을 위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말을 했다. 공정성 제고 방안으로 대입 정시 비중 확대, 고교 서열화 해소, 채용비리 근절, 공정경제 제도화 등이 제시됐다.

하지만 깊은 상처를 입은 뒤 되돌아오긴 했으나 이 정부에서 얼마나 실질적으로 공정을 위한 개혁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내가 볼 때, 조국 사태 이후 겨우 돌아온 공정의 얼굴은 정부 출범 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때의 공정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사실 공정 자체는 이 정부의 고유 가치가 아니며 이전 정부도 활용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는 전반기 국정 핵심 담론으로 ‘선진화’를 내세웠다가 양극화 심화와 각종 비리 의혹 때문에 후반기에 ‘공정한 사회’ 구호와 이에 바탕한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을 꺼내 들었다. ‘공생 발전’을 이루겠다는 말도 했다. 엠비의 공정사회 실현 방안에는 사교육비 절감을 포함한 교육개혁, 가난 대물림을 끊기 위한 학자금 지원, 서민의 내 집 마련을 돕는 보금자리주택 공급, 계층별 맞춤형 일자리 창출, 대-중소기업의 상생 정책 등이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녹슨 공정을 다시 끄집어내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공정을 어떻게 실현’하려는가에 있다.

■ 교육분야 공정성 개선 방안으로 불쑥 대입 정시 비중 확대가 제시된 것은 놀랍다. 사실 공정성은 보수·진보 모두에 걸려 있는 경합적인 이중개념이고 평등과 함께할 때 진보적 개념으로 구성된다.(레이코프) 이 관점에서 정시 확대는 조건의 평등화 조치가 빠진,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인 ‘공정경쟁’ 방안이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물론 문제가 있지만, 계층별, 지역별 격차를 완화하는 데 수능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조사 결과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20%의 특권 대물림 통로가 된 교육 불평등 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노동시장에서 학교 서열화 및 차별을 철폐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 정부 방안에 공정경제의 제도화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내용일지 모호하며, 공정한 노동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이 정부는 노동존중사회 만들기를 약속했다. 하지만 갈수록 반노동 행보로 뒷걸음질했고 이는 한-일 갈등, 조국 정국에서 계속됐다.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는 상황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이 ‘톨게이트 노동자는 없어지는 직업’이라며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이 정부 4차산업혁명위원장의 노동에 대한 무지와 폭력적 발언은 또 어떤가. 공정경쟁 및 4차 산업혁명의 구호 아래 노동, 토지, 금융의 무리한 시장화가 부단히 강요될 위험이 있다. 기술과 무책임자본이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을 갈아넣을 수도 있다.

■ 왜 사모펀드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을까. 사모펀드는 공론으로 다루기에 까다로운 지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불공정, 불평등 논의에서 20% 부자들을 중심으로 돈놀이를 하며 편법 상속수단으로도 활용하는 이 세계의 언급은 불가피하다. 조국 사태에서 사모펀드 이슈는 일차적으로 고위공직자의 위법성 문제로 제기됐고 재판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그것은 투기적 약탈자본(이른바 먹튀) 및 자산 불평등 확대 문제라는 어두운 지점이 있다. 론스타, 칼라일, 맥쿼리, 엘리엇 등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는데, 역대 정부 지원책으로 토종 사모펀드들도 빠르게 성장했다. 사모펀드와 관료, 법조계의 공모는 잘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는 혁신성장동력으로 사모펀드판을 키우는 기본기조를 갖고 있고 지난해 큰 폭의 규제완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포용적 혁신성장이든 혁신적 포용국가든, 사모펀드 이슈가 함축하는바 자산 불평등 및 약탈자본 문제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갖지 않으면 큰 곤란에 빠질 수 있다.

이병천ㅣ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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