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30 05:00
수정 : 2019.04.3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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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에서 열린 스무번째 ‘데님 데이’ 행사. 각국 여성들은 “강간에는 어떤 동의도 없다”는 뜻에서 매년 4월24일 청바지를 입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데님 데이 공식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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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법률사무소
“혼자 못벗겨…합의 따른 관계” 주장
법원, 피고인 주장 수용 무죄 판결도
피해자에 ‘강력 저항 입증’ 책임 지워
변호인 “여성 옷차림 걸고 넘어져”
해외서도 ‘청바지에 면죄부’ 반발
‘청바지 입는 날’ 캠페인 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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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에서 열린 스무번째 ‘데님 데이’ 행사. 각국 여성들은 “강간에는 어떤 동의도 없다”는 뜻에서 매년 4월24일 청바지를 입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데님 데이 공식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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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는데 헐렁하지 않은 청바지를 입었다. 바지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단 단원들에 대한 상습강제추행, 유사강간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변호인은 항소심 재판부에 ‘청바지’와 ‘손가락’을 증인으로 세울 태세였다. “(바지 안쪽으로) 손가락 두개를 넣을 수 있는 간격이다. 네개가 들어갔고, 그 손가락이 팬티 안으로 들어갔다는 (단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손가락은 다시 손목으로 굵어졌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들어갔다고 진술했다가 (나중에는) 손목까지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손목까지 들어가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면 그건 흘러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 바지를 입고 공연을 할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는 이 전 감독이 연기를 지도하다 갑자기 자신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고 진술했다. 이 전 감독 쪽 변호인은 극구 부인했다.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손이 들어갈 수조차 없다. 신체접촉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 급기야 이 전 감독은 법정에서 직접 재연을 해보겠다는 뜻까지 내비쳤다.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서 함께 연기지도를 받던 목격자가 있었다. 그는 “저렇게 손이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의아했다”고 진술했다
.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달 26일 이 전 감독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청바지 성폭행 불가론’은 많은 성범죄 가해자들이 단골로 꺼내는 변론 전략이다. 실제로 법원이 “청바지는 쉽게 벗기기 힘들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한 사례도 있다. 성범죄 사건을 맡는 변호사들은 “여전히 여성의 옷차림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자주 걸고넘어지는 문제”라고 말한다.
2015년 창원지법. 피고인은 피해자가 입었던 ‘스키니진’을 ‘합의에 의한 성관계’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에서 관계를 맺었는데 “스키니진은 혼자 벗길 수 없으므로” 여성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 여성은 문제의 바지를 법정에 제출했다. 바지는 피고인의 주장과 달리 스키니진이 아닌 신축성 있는 밴드형 바지였다
. 가해 남성에게는 유죄가 선고됐다.
“바지 허리춤을 잡거나 다시 끌어올렸지만 피고인이 바지를 벗겼다.”(여성) “꽉 끼는 청바지를 입어서 피해자가 바지를 다시 올렸다가 직접 팬티와 함께 내렸다.”(남성) 지난해 부산고법 창원재판부는 피고인인 남성 쪽 손을 들어줬다. 검사는 술을 마신 뒤 남성 2명이 피해 여성을 성폭행했다고 기소했지만, 재판부는 여성이 운동선수인 점, 미성년이지만 평소 선배인 피고인과 술을 마셔온 점 등을 들어 위력을 행사하거나 협박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성이 바지를 다시 추어올린 것을 ‘저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위력을 행사해 성관계에 이른 것은 아닌지 의심은 든다”고 했지만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만큼 충분한 위력을 이용한 것으로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준강간 사건에서 ‘청바지 성폭행 불가론’은 자주 등장한다. 형법에서 준강간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할 때 성립한다. 신진희 변호사는 29일 “성관계를 위해 옷을 벗은 게 아니라 술에 취해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도 많은 피고인들이 ‘여성이 원해서 옷을 벗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술에 취한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기억하기 어려운 점을 이용해 청바지를 동의에 의한 성관계의 근거로 가져다 쓰는 것이다.
법정에서 불거진 청바지 논란은 외국도 마찬가지다. 1999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피해자가 입은 꽉 끼는 청바지는 여성의 도움 없이 벗기기 힘들다. 강간이 아닌 동의에 의한 성관계”라며 가해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청바지가 정조대인 줄 아느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이탈리아 여성 국회의원들은 판결에 항의해 청바지를 입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동참한 각국 여성들은 ‘강간에는 어떤 동의도 없다’는 뜻에서 해마다 4월24일 청바지를 입는 ‘데님 데이’ 캠페인을 열고 있다. 지난 24일 열린 스무번째 데님 데이 행사에는 전세계 1천만명이 넘는 여성이 참여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8년 앞서 내린 ‘중세적 판결’을 뒤집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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