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27 04:59
수정 : 2019.05.27 07:43
[한겨레 법률사무소]
트랜스젠더 울리는 ‘대법원 예규’
인권침해적 예규에 발목 잡혀
성별 정정 포기하는 이들 많아
“외국에선 이런 사례 없어”
강제성 없는데도 서류 요구
“어디까지 갔냐” 묻는 판사
“고환 절제해도 발기가 되나요”
심문 과정 모욕적 질문도 예사
국제인권기준 맞게 예규 손봐야
“절차 쉽게” 유엔 권고도 외면
“부모님 전화번호가 뭐예요? 내가 직접 부모님이랑 통화해볼게요.”
트랜스젠더 여성 류세아(28)씨는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인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기 위해 지난해 서울의 한 법원을 찾았다. 판사는 대법원 예규를 근거로 “성별 정정에 동의한다”는 부모 동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류씨는 이를 받지 못했다. 부모는 류씨를 이해하지 못했고, 설득 과정에서 흉기가 등장하기도 했던 터다. 류씨가 부모 동의서를 받지 못하자, 판사는 동생의 동의서를 요구했다. 결국 류씨는 해당 법원에서 성별을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성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성별 정정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번째 숫자를 바꾸지 않으면 구직은 물론 보험 가입, 출국, 통신사 가입 등 일상 전반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매년 수백명이 성별 정정 절차를 밟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법원 예규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닥친다.
법원은 2006년 6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에 관해 정리된 기준을 내놨다. 대법원은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전원합의체 결정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란 기재는 물론, 이에 따라 부여된 주민등록번호가 종전의 성을 따라야 한다면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해 9월 성별 정정 요건과 절차가 담긴 예규(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 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지침)가 만들어졌다. 예규는 법원 내부 규칙으로 강제력이 없지만, 일선 법원에서 성별 정정의 판단 기준과 절차적 규범으로 쓰인다.
대법원 예규는 엄격한 조건을 이유로 불필요한 서류를 요구한다. 부모 동의서(예규 3조1항6호)가 대표적이다. 성별 정정은 법률적 행위 능력이 있는 성인이 되어야 가능한데 부모의 동의를 요구한다. 성전환 과정에서 부모와 갈등을 빚는 이들이 많은 현실도 법원은 외면한다. 대법원 판례상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동의서가 아닌 사유서로 대체할 수 있지만, 류씨와 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이 펴낸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절차 개선을 위한 성별 정정 경험조사’ 보고서를 보면, 설문에 응답한 트랜스젠더(70명)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32명)이 부모 동의서 제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박한희 변호사는 “외국은 부모 동의서를 요구하는 사례가 없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부모 동의서 때문에 성별 정정을 포기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1년간 설득을 거쳐 아버지 동의서를 제출했더니 재판부가 ‘부모’라는 글자를 내세워 어머니 동의서도 제출하라고 한 사례도 있다.
심문 과정에서 인권 침해적인 요구나 질문에 노출된 사례도 있다. 지난해 12월 트랜스젠더 여성 박지민(가명)씨는 수도권 한 법원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판사는 심문 과정에서 “양측 고환을 절제했는데 성기가 발기는 되나요” “여성호르몬 치료를 중단하면 발기가 되나요” “양측 고환 절제한 이후 한번도 발기된 적이 없나요” 등을 거듭 질문했다. 판사는 과거 애인과 성관계를 했는지, ‘어느 선까지 갔는지’를 묻기도 했다. 긴장한 박씨는 “판사가 물어보면 일단 다 답해야 하니까” 내밀한 사생활을 털어놨지만, 법원을 나서는 길에 “판사가 개인의 ‘성적 호기심’을 해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씨의 성별 정정 요구는 기각됐다.
앞서 2012~2013년 일부 법원이 심문 과정에서 성기 등 신체 사진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괜찮은’ 판사를 찾아 법원을 옮겨다니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선진적이라는 외국 법을 보면 ‘외견상 사회생활을 할 때 (법적 성별과) 반대의 성으로 인식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돼 있다. 굳이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들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권단체들은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해 예규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인권기준에 맞게 기준을 완화하고, 모욕적인 질문을 하거나 불필요한 자료를 요구하지 않게끔 예규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한국에 권고했지만 대법원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지난 4월 법무부가 주최한 유엔 자유권규약 이행 관련 간담회에서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법원행정처가 면담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대법원 관계자는 “개인의 성별은 개인의 자아정체성뿐 아니라 가족관계에 끼치는 영향도 중대하다. 부모 동의가 필요한지 사회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하다”며 “일선 법원의 의견, 사회인식 변화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개정 필요성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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