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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3 10:40 수정 : 2019.03.25 11:51

[토요판] 임진영·염상훈의 앙성집 짓기
① 집 짓기를 시작하며

건강 때문에 앙성 자주 가는 어머니
아들네가 건축비, 부모님이 땅값 부담
함께 사용하는 두번째 집 짓기로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대화 끝에
서울과 다른 삶 살길 원한다 결론
작지만 하늘·바람·빛·비를 들이고파

정재헌 건축가의 도천 라일락집. 도천 도상봉 화백이 기거하던 터에 4대째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의 살림집과 도상봉 선생의 기념관을 겸하는 집이다. ㄱ자 살림집과 기념관으로 작은 마당을 만들어, 주변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면서도 건물의 높낮이를 달리해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풍경을 만든다. 사진 박영채
▶ 임진영은 건축저널리스트이자 기획자다. 건축전문지 <공간> 편집팀장을 지냈고, 현재는 <마크> <도무스> 등에 글을 쓰며 건축물 개방 축제인 ‘오픈하우스서울’을 기획하고 있다. 남편인 염상훈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이자 건축가다. 움직이는 파빌리온 ‘댄싱 포레스트’ 등을 설계했다. 부모님과 함께 쓸 ‘앙성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과 좋은 공간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 격주 연재.

건축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동시대 건축가들이 지은 건축물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뮤지엄에서 사옥, 그리고 집까지, 건축물의 내·외부를 직접 보는 것은 근사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는 건 감사한 일이다. 집에는 가족의 인생과 소망이 담겨 있다. 집마다 다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담은 다른 공간이 있었다. 쉽게 방문하기 어려운 가정집을 찾아가 건축가의 설명과 집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공간을 누리다 보면, 그곳에 사는 가족, 특히 아이들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 집이 호화롭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다. ‘다른’ 공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집들은 건축가 조병수의 ‘ㅁ자집’, 건축가 정재헌의 ‘도천 라일락집’과 ‘두물머리주택’, 그리고 건축가 문훈의 ‘롤리팝’ 등이다. 과감한 공간 구성에도 편안함이 느껴졌고, 창 하나가 보여준 풍경이 뇌리에 남거나 야외 데크에서 머물 때 스쳐간 바람이 여운으로 남아 있다.

누구에게나 집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고 자란 동네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대문의 색과 마당, 방의 크기와 장식, 바닥의 온도와 창가의 한기, 창밖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최초의 집>(신지혜 지음)이라는 책도 있다. ‘우리가 처음 살았던 집’에 대한 14가지 기억을 기록했다. 농촌주택에서 일식주택, 다세대주택과 아파트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집을 세세하게 구술하고, 건축가이자 저자인 신지혜 작가는 그 기억을 토대로 평면도와 투시도를 그려냈다. 주먹구구식으로 지어진 집에도 추억은 곳곳에 배어 있고, 시간이 지났어도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생생하기만 하다. 몸에 밴 공간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렇다면 살고 싶은 집은 어떨까?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휴식은 어떻게 취하는지, 어느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싶은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건축가 조병수는 “모든 동물은 스스로 집을 짓는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이 사는 집을 꿈꾸고 그려낸다는 의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집을 짓길 꿈꾼다. 자신의 거주 공간을 상상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공간 경험’에 대한 질문이다. 건축가는 그런 의뢰인의 바람을 바닥과 벽, 열리고 닫힌 공간으로 구축하고 실현한다.

조병수 건축가의 ㅁ자집. ㅁ자 콘크리트 상자 가운데를 비우고 한옥 고재를 기둥 삼아 간결한 집을 만들었다. 건축물을 단순하게 구성하면서 열린 중정을 통해 하늘과 바람, 빛과 자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 김종오
건축가인 남편(염상훈)과 건축전문기자인 나도 아파트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싶었다. 공간이 주는 경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신혼집을 고를 때 경복궁 서쪽(서촌)을 열심히 돌아보기도 했다. 작은 이층집을 고쳐볼까 고민하기도 하고, 상가주택을 사서 꼭대기층에 살 고민도 했다. 경복궁 서쪽이 들썩이며 가격이 치솟으면서, 우리는 집 짓기를 포기하고 아파트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집을 짓고 살기엔 땅값이 너무 비쌌다. 결혼 뒤에도 남편은 종종 경매 사이트를 들여다보았다. 간혹 경매에 나온 이상한 모양의 땅을 보면서 그래도 건축적으로 풀어낼 여지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다른 집에서 살 수 있겠지 하는 바람은 계속되었다.

서울에 사시는 아버님, 어머님은 꽤 오래전부터 충북 충주시 앙성면 근처에서 지인들과 걷기 운동을 하셨다. 어머님 건강이 나빠지면서 두 분은 앙성에 더 자주 내려가 운동과 치료를 하기로 하고 땅을 사셨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내부를 개조한 컨테이너 하나를 두고, 서툰 농사일을 하기도 하며 건강을 돌보셨다. 건축가인 아들은 어머님 환갑 때 그 땅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마스터플랜을 짜서 선물했다. 그사이 아들은 결혼을 했고, 손자가 태어났다.

아버님의 은퇴 뒤 앙성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모님은 그곳에 작은 집을 짓기로 했다. 그러니까 시작은 부모님의 시골집이었다. 일상생활을 모두 할 수 있는 시골집을 생각하다 보니, 집은 점점 무거워졌다. 필요한 공간이 늘어났고 집의 부피가 커지면서, 과연 이 비용으로 ‘전원주택’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 시골집을 부모님과 아들네인 우리가 공유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최근 늘고 있는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두번째 집(세컨드하우스) 말이다. 강미선 이화여대 교수(건축학 전공)를 비롯한 11가구가 조합을 만들어 공유하는 제주 ‘고산집’이 좋은 사례다. 부모님이 땅을 제공하고 건축비는 우리가 대기로 하면서 앙성집은 두 세대가 함께 쓰는 집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떠날 수 있는 집에 대해 상상했고, 어머님과 아버님은 주로 시간을 보내되 좀 더 가볍게 머물 수 있는 집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몇년 만에 드디어 실행에 옮기면서, 건축가인 남편은 세 의뢰인을 마주하게 됐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건축의 합리적 미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재치와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어머니, 그리고 건축전문기자인 아내다. 한마디로 본 게 너무 많은 아내와 성향이 다른 두 부모님이다.(많은 의뢰인들을 보면 대체로 남편과 아내가 생각하는 집의 기능과 성격이 다른 경향이 있다.) 다행히 전혀 달라 보였던 세 방향의 요구는 누군가가 포기하고 누군가는 손을 들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치가 공존하는 한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아이디어가 넘치면서 잘만 할 수 있을 것 같던 설계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지난한 행군이었다. 가장 든든한 지지자인 동시에 의뢰인인 부모님은 원하는 바가 있지만 그렇다고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무엇이 정답일지 몰라 종종 침묵했다. 절대적인 지지는 건축가에게 자유를 주기도 했지만, 의뢰인이 주는 긴장감이 없으면 설계의 근거가 약해질 수도 있다. 첫번째 설계안이 나오기까지 느렸던 진행은 이런 소통의 문제에 원인이 있었다. 실은 우리가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서울과 다른 삶을 살길 원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고 지고 사는 살림집이 아니라, 복잡한 도시에서 경험하지 못한 풍경과 여유, 공간을 누리고 싶었다. 작은 평수지만 공간을 확장해 그곳에서 하늘과 바람, 햇빛과 비, 계절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다른 공간’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축가 문훈의 롤리팝 주택. 회오리 무늬의 사탕처럼 중심을 비워 실내 중정을 만들고 중정을 따라 계단을 둘러 올라가게 했다. 각 층을 어긋나게 배치한 스킵플로어로 구성해 방과 주방을 두었다. 계단을 중심으로 한 수직공간 덕분에 집이 넓어 보이고 밝으며, 방과 주방, 거실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사진 남궁선
집은 튼튼하고 안전한 것으로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집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나 빛, 바람, 빗소리가 안정감과 평온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경험의 시퀀스를 만드는 것이 3차원의 공간을 구축하는 건축의 구실이자 가능성이라는 것도 안다. 그 경험을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 있는 비례와 구성, 질 높은 공간이고, 좋은 공간의 경험이야말로 건축이 주는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원하는 공간을 생각해보고 다른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꿈꾸는 것에서 시작해 하늘과 땅의 변화무쌍함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지까지 상상하며, 집을 설계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치열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앙성집은 기본 설계를 끝내고 실시 설계를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던 집이 눈앞에 실체로 나타날 때까지, 도면과 모형, 실시 설계의 지시서와 시공 도서의 상세한 도면들이 쌓여갈 것이다. 이 연재는 그 과정과 시행착오에 대한 중계이지만, 더불어 집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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