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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8 09:26 수정 : 2019.09.28 09:41

[토요판] 임진영·염상훈의 앙성집 짓기
⑬ 집의 정서를 만드는 장치들

어릴 적 아궁이, 마당, 수돗가…
집은 물리적 구조물만이 아닌
정서와 경험이 형성되는 장소

사소함이 결정하는 ‘아늑함’
물·불·바람 등 자연 담아야
사물인터넷도 ‘환대효과’ 살려

건축가 최두남이 설계한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택’은 성벽과 집 사이에 계단을 두어서 2층 현관으로 들어가게 했다. 성벽 사이에 계단과 수공간을 두어 사이 공간이 풍성해졌고, 계단은 그대로 옥상까지 뻗어간다. 김종오 제공
어릴 적 큰집은 시골에 있었다. 옛 티브이(TV) 드라마 <전원일기>(문화방송·1980~2002)의 김 회장 댁 같았던 큰집에는 큰 아궁이가 4개나 있었다. 커다란 솥 3개와 작은 솥 하나가 걸려 있었고, 솥마다 씻기 위한 물이나 밥과 국이 끓고 있었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짚단이 타들어가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도 온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어른들 틈에서 허락된 유일한 불놀이였다. 부엌과 마루, 대추나무가 있던 앞마당과 감나무가 있던 뒷마당, 마당의 수돗가에서 놀던 기억. 집에 대한 내 정서는 집장사의 집과 아파트를 전전해온 어릴 적 우리 집이 아니라, 아궁이로 불을 때던 오래된 시골 큰집이 가득 채우고 있다. 한여름 쏟아지던 장맛비, 노란 물결이 펼쳐지던 가을 들녘, 처마에 달린 고드름과 썰매를 타기 좋았던 겨울의 논 등 계절의 변화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집에 대한 기억과 정서는 물리적인 구조물을 넘어서는 경험이다. 신경인류학자인 존 앨런은 집을 단순히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일 뿐 아니라 편안함, 안전함, 그리고 통제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집에 마음을 두며, 집은 ‘그저 건물이나 주거지가 아니라 정서와 지위를 전달하는 매개물’이다. 그리고 그 ‘집의 느낌’은 감각 입력, 기억, 정서로부터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물리적인 구축물만큼이나 그 경험의 폭을 확장하는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바람, 빛과 비와 같은 자연현상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적절히 비워둔 구조물도 있지만, 물과 불을 접할 수 있는 장치, 나무와 꽃과 같은 조경 장치로도 그 감각과 정서를 충족시킬 수 있다. 집이 주는 경험의 가치는 어떻게 확대할 수 있을까.

건축가 조병수의 ‘ㅁ자집’ 중정에는 수공간을 두고 폴더형 유리문을 모두 열 수 있도록 했다. 수공간은 물에 대한 시각적 경험뿐만 아니라 청각을 통해서도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김종오 제공
하늘을 끌어들이는 수공간

2000년에 지어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택’은 건축가 최두남의 자택이다. 진돗개를 키우고 싶어 한 자녀를 위해 건축가는 부암동 작은 땅에 집을 짓기로 했다. 성곽과 길 사이에 놓여 복잡한 제약을 가진 삼각형 땅이었다. 심지어 지적도와 현황이 달라 부지 일부를 잘라내어야 했다. 땅의 모양을 거르스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고 절제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집은 반달 모양을 하고 있다. ‘부암동 주택’의 백미는 집과 성벽 사이에 있다. 집은 1층에서 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땅의 경사를 그대로 살려 계단을 통해 올라간다. 계단은 1층에서 2층 현관을 지나 집의 옥상까지 그대로 이어져 있는데, 덕분에 성벽과 집 사이에 선형의 켜가 중첩된다. 단 차이와 함께 기다란 수공간(물이 흐르는 공간)을 더하면서 집과 성벽 사이의 공간은 풍부해졌다.

적절한 위치에 자리한 수공간은 집의 물리적 구조물에 자연을 끌어올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얕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변화무쌍한 하늘을 반영하면서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주는 청각도 우리에게 평온함을 줄 수 있다. ‘부암동 주택’의 작고 긴 수공간이 사이 공간을 풍성하게 해준다면, 수공간이 건축물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건축가 이타미 준의 수박물관은 물을 테마로 한 대표적인 사색의 공간이다. 원형의 지붕 아래 반듯한 물 위로 하늘과 빛의 변화를 담아내며 정적으로 흐른다. 투박한 막사발의 멋과 닮은 ‘ㅁ자집’의 중심에도 수공간이 있다. 건축가 조병수는 ‘ㅁ자집’에서 콘크리트의 단순한 상자를 만들었다. 건축이 자연을 경험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가운데에 중정을 두고 그곳에 수공간을 두었는데, 중정에 면해 폴더식 유리문을 두어, 날이 좋은 때는 모두 활짝 열어둘 수 있다. 집 안에 앉아 수공간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은 언제나 평화롭기만 하다.

앙성집에서 수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머님이 적극적이셨다. 전면 데크 앞에 물이 흐르면 물소리도 들리고 발도 담글 수 있어 좋겠다는 바람이셨다. 수공간의 크기가 꼭 클 필요는 없었다. 작은 시냇물처럼 집의 어느 곳에 물이 얕게 흐를 수 있다면 효과는 충분하다. 처음엔 앙성집 거실 바깥 데크와 마당 사이에 수공간을 두었다. 1m 폭의 좁은 수공간은 마당과 집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 같았다. 몇 번의 설계 변경 후에 수공간은 별채를 잇는 T자형 야외 데크에 4m×2.7m 정도로 변경됐다. 안채에서도 별채에서도 볼 수 있는데다 마당에서 접하기도 좋았다. “데크 앞 수공간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드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안채와 별채의 경계가 더 강조된다. 또 데크에 나란히 앉아 발을 담글 수 있던 곳에서 바라보는 수공간으로 바뀐 셈이다.”(염상훈)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 반사되는 빛, 그리고 물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택에서는 거실과 부엌 사이에 벽난로를 두었다. 공간을 나누면서도 양쪽에서 불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다. 이종근 제공
원초적인 불, 벽난로의 로망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벽난로만큼 낭만적인 장치가 또 있을까? 불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념이 사라지는 순간은 누구도 마다하기 힘들 거다. 환기나 관리가 번거롭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집의 어느 한 곳을 포기하더라도 꼭 벽난로를 두고 싶었다.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던 때, 모니터에 벽난로 영상을 틀어두었다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난로는 벽 안쪽에 매립하는 방식과 독립된 기기로 돌출하는 방식이 있다.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돌출형의 경우 열기가 공기에 더 잘 전달될 수 있어서 난방에도 도움이 된다. 벽난로의 형태는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일 공간을 가변적으로 구획해 사용할 경우, 벽난로 자체가 공간을 나누는 구실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암동 주택’의 경우 좁은 내부를 넓게 사용하기 위해 미닫이문과 스크린을 적극적으로 쓰고 있다. 거실과 주방이 이어지고, 침실 공간은 미닫이문으로 열고 닫아 쓰도록 했다. 그리고 거실과 부엌의 중간에 오픈형 벽난로를 두어서 두 영역을 나누었다. 아주 작은 벽난로지만, 양쪽으로 열려 있으니 각 공간을 분리해주면서도 거실과 식탁에서 모두 불을 마주할 수 있게 했다. 천창을 두고 옆에 놓인 작은 벽난로만으로 좁은 거실은 아늑한 공간으로 바뀐다. 벽으로 구획되지 않은 앙성집의 거실과 부엌에도 벽난로는 영역을 나누는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벽난로의 위치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도 정해지니, 거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모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공간의 아늑함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질문도 계속하면서 말이다.

집이 주는 경험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할 때, 남편은 집이 우리를 환대하는 느낌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정서를 채워주는 집이 아늑함을 갖게 되는 것에는 그만큼 쌓인 기억과 정서, 경험이 큰 구실을 하겠지만, 집 자체가 우리를 환대하는 느낌을 만들어주는 것은 세세한 부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을 활용하는 것도 흥미로운 장치가 된다. 방문하기 전, 미리 보일러를 돌려 집을 데우고, 불을 켜두고, 집을 작동시키는 것만으로 우리는 집이 우리를 환영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집에서 느끼는 아늑함, 어떤 종류의 친숙함들은 원초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 두번째 집이라면 물과 불,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곳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더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임진영은 건축저널리스트이자 기획자다. 건축전문지 <공간> 편집팀장을 지냈고, 현재는 <마크> <도무스> 등에 글을 쓰며 건축물 개방 축제인 ‘오픈하우스서울’을 기획하고 있다. 남편인 염상훈은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이자 건축가다. 움직이는 파빌리온 ‘댄싱 포레스트’ 등을 설계했다. 부모님과 함께 쓸 ‘앙성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과 좋은 공간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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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임진영·염상훈의 앙성집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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