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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0 10:29 수정 : 2017.11.10 16:48

임선재(오른쪽)씨가 지난 6일 오후 야근조로 출근하기 전 일터가 있는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승강장에서 연인 최서현씨를 만나 포옹하고 있다. 2교대로 밤낮이 엇갈리는 임씨의 근무 형태 탓에 주말에도 낮 데이트가 쉽지 않은 이들에겐 출퇴근이 서로 엇갈리는 짬을 이용해 틈틈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얼굴을 보는 게 큰 기쁨이다.

어느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희망가

임선재(오른쪽)씨가 지난 6일 오후 야근조로 출근하기 전 일터가 있는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승강장에서 연인 최서현씨를 만나 포옹하고 있다. 2교대로 밤낮이 엇갈리는 임씨의 근무 형태 탓에 주말에도 낮 데이트가 쉽지 않은 이들에겐 출퇴근이 서로 엇갈리는 짬을 이용해 틈틈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얼굴을 보는 게 큰 기쁨이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열차가 도착했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승강장 기둥 한쪽에 기대어 선 두 사람의 대화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지만, 연신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꽃이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자막으로 읽혔다. 저기 서 있는 남자는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 임선재씨다. 그 앞에 선 여자는 청소년단체 시민활동가 최서현씨. 둘은 4년째 연애 중이다.

최저임금 1만원 되면 결혼 약속했지만…

벚꽃축제가 한창이던 지난 4월9일 서울 여의도에서 양복과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두 사람이 활짝 웃고 있다.

지난봄 두 사람은 벚꽃 흐드러진 서울 여의도에 멋진 양복과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섰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자는 한 시민단체의 캠페인에 동참한 이들은 “최저임금 1만원이 되면 결혼하겠다”는 공약을 걸고 “우리 제발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는 애교 섞인 호소로 꽃놀이 나온 시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뒤 2018년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결정됐다. 정부는 2020년 1만원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결혼도 그때까지 미뤄질까. 이 가을 그들을 다시 만나 눈치 없이 물었다. “그래서 결혼 정말 언제 할 생각이에요?”

난 정규직화 대상인데 언제쯤 될지…

지난 6일 오후 서울 도봉구 창동역 승강장으로 출동한 임선재씨가 동료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고 있다.

남자는 “일단 지금 진행 중인 회사의 정규직 전환이 마무리된 뒤”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서울교통공사 소속 무기계약직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5월28일 구의역 사고 이후 스크린도어 관련 업무를 하청업체 위탁에서 직접 관리로 전환하기 위해 안전업무직 직원들을 채용했다. 한 청년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그해 9월 임씨를 비롯한 동료들이 들어왔다. 지난 여름 서울시가 서울교통공사 등 투자·출연기관 무기계약직 2400여명을 연내 정규직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방안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이 불거졌다. 7급으로 시작하는 정규직 신입사원들과 달리 무기계약직에서 전환한 이들에게는 8급을 신설하거나 근속 승진 연한을 몇 년 더 늘려야 한다는 식의 단서가 거론되고 있다. 이런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임씨와 동료들은 내년 정규직으로 입사할 후배들과 똑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진급 역전이 불가피하다. 누구에겐 ‘합리적인 차이’로 해석되지만 다른 누구에겐 ‘실질적인 차별’이 된다.

어서 그녀와 신혼일기를 쓰고 싶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쥐고 간다. 까칠한 손가락에는 그 흔한 커플링도 없지만 함께 잡은 두 손이 단단해 보인다.
남자친구의 페이스북 계정을 살펴보는 최서현씨의 스마트폰 액정이 파손되어 있다. 빠듯한 생활비에 수리를 미뤘다.

둘 사이의 연애담을 좀더 물으니 출퇴근길에 지하철 역사에서 잠깐씩 만나거나 일 마친 밤에 심야 극장이나 찜질방에서 데이트하는 게 대부분이라는 심심한 답이 돌아왔다. “월세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내년 겨울쯤으로 결혼 시기를 미뤄 답했다. 그때쯤이면 그는 행복한 정규직 사원이 되고, 서현씨는 눈꽃 같은 겨울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야근조 근무를 위해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두 사람은 그 흔한 커플링도 끼지 않은 맨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결혼 시기를 묻는 게 우문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시민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노동자이고, 둘은 서로의 삶을 격려하고 함께 걷는 동반자다. 사랑의 본질을 지켜가는 이들의 청춘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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