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2 07:56
수정 : 2019.12.0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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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은 안정효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하얀 전쟁>으로 군사정권 체제의 한국 사회가 덮어놓고 미화했던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대담하게 물었다.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자본의 이전투구장인 전쟁이 끝나면 그 전쟁에 내몰렸던 참전 용사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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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CJ 문화재단 공동기획]
(97)<하얀 전쟁>
감독 정지영(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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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은 안정효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하얀 전쟁>으로 군사정권 체제의 한국 사회가 덮어놓고 미화했던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대담하게 물었다.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자본의 이전투구장인 전쟁이 끝나면 그 전쟁에 내몰렸던 참전 용사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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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전쟁>은 베트남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첫 한국 영화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끝나고 전두환 군부가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을 꾀하던 1980년 현재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베트남 참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소설가 한기주(안성기)의 삶을 좇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시사월간지에 베트남전쟁 소재 소설을 연재하는 한기주는 자신과 동료들의 트라우마를 팔아먹는다는 자기모멸감에 시달린다. 군대 후임병이었던 변진수(이경영)가 연락해오자 한기주는 자신의 고통이 두겹 세겹으로 불어나는 걸 느낀다. 한기주와 변진수의 일상에 전쟁으로 인한 환청과 환각이 끼어들 때 화면은 베트남전쟁 당시로 넘어가며 과거의 고통은 끊임없이 현재화된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로 데뷔한 정지영 감독은 스릴러와 멜로 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코리안 뉴웨이브’ 일원에 합류했다. 당시로선 소재를 다루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남부군>을 영화화해 비평과 흥행에 모두 성공한 뒤 안정효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하얀 전쟁>으로 군사정권 체제의 한국 사회가 덮어놓고 미화했던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대담하게 물었다. 자유세계 수호라는 명분 아래 베트남 내전에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던 가난한 뉘 집 자식들은 상당수가 죽고 다치고 병들었으며 나라는 그들의 피로 돈을 벌었다. 영화 속 한 장면, 술자리에서 뻣뻣한 한기주를 비아냥거리는 동창생들을 향해 시사월간지 편집장인 한기주 친구는 박 대통령을 찬양하는 일행의 좌장을 향해 힐난한다. “그만해라. 얘들이 베트남 정글에서 박박 길 때 니네 집에선 군수품 팔아서 돈 번 거 아니냐?”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자본의 이전투구장인 전쟁이 끝나면 그 전쟁에 내몰렸던 수많은 한기주·변진수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그들의 삶은 그때부터 폐허다. 영화 말미에 한기주와 변진수는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 진압대 사이에서 혼란과 공포에 빠져 방황한다. 안정효의 소설을 시각적으로 옮긴 감독 정지영의 직설적인 웅변이었다.
김영진/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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