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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0 17:02 수정 : 2019.05.10 11:26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꽃망울이 터지면서 지난해 흥얼거렸던 ‘벚꽃엔딩’이 다시 음원 순위에 오른다. 2012년 발표된 이후,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던 이 곡은 매년 봄마다 음원 차트에 재진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벚꽃 좀비’나 ‘벚꽃 연금’이라는 재미있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장범준씨(버스커 버스커)가 얼마 전 티브이에 나와 겨울에 우울증을 겪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느낌을 “봄에는 치료받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나를 치료해준다고 했다”고 표현했다. 봄의 전령사로 부러움을 받아온 그가 겨울마다 우울증을 겪는다니!

이런 경우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은 계절성 우울증이다. 특정한 계절마다 기분이 처지거나 혹은 기분이 너무 들떠서 문제가 되는 것을 통틀어 계절성정동장애(SAD)라고 한다. 이는 계절적인 흐름을 타는 특성을 가진 기분장애의 한 유형으로 가을과 겨울에 증상이 나타나 봄, 여름이 되면 증상이 나아지는 경우가 많다. 드문 편이지만 겨울철이 아니라 봄과 여름에 우울 증상이 심해지고 가을이 되면 호전되는 봄철 우울증, 여름철 우울증도 있다.

그런데 진료실을 찾는 우울증 환자는 1~2월에 오히려 감소했다가 3월에 많아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 결과에서도 3~4월의 우울증 환자가 한겨울인 1~2월보다 약 23만명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겨울철 우울증이 많다는 연구 결과와 다르게 진료 현장에서는 왜 많은 사람들이 봄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일까.

봄에는 많은 변화가 생긴다. 학생들은 새 학교 혹은 새 학년에 설렘, 기대, 두려움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고 적응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변화는 더욱 커진다. 사회초년생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람,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재수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에는 다 같은 학생 신분이었으나 3월이 되면서 직업이 달라지고 주위와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직장인의 경우에도 조직개편이 연초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새로운 팀원과 새로운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진다. 연봉협상도 2~3월에 하는 회사가 많은데,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보상에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엄밀히 구분한다면 환경의 변화 등으로 생긴 것은 ‘봄철 우울증’이 아니다. 봄철 우울증으로 진단하려면, 지난 2년간 매년 봄에 우울 증상이 시작되었다가 이후 특정 시기에 좋아진 경험이 있어야 하며 뚜렷한 심리적 스트레스 요인은 없어야 한다. 봄철 우울증에서는 체중 감소, 식욕 저하, 불면, 불안 및 초조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봄에 생긴 우울증’의 특징은 무기력감이다. 학생들은 어떻게든 학기 초반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다가 지친다. 고등학교 내내 입시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잘되지 않아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생각했던 학교생활과 다름을 발견하고 진정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지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서도 노력한 만큼 보상이 충분하지 않으면 일할 의욕을 잃고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

봄이 오면 나른하게 늘어지는 것을 춘곤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면서 몸이 적응하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그 자체가 병은 아니다. 그런데 우울증 때문에 무기력해진 증상을 춘곤증으로 잘못 짚는 수가 있다. ‘봄이 되면 원래 그래’라는 식으로 봄철 우울증을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무기력하면 편하게 넘어갈 일도 평탄하게 넘기지 못하고 짜증을 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벚꽃놀이를 간다는 말만 들어도 시간과 일에 쫓겨 꽃놀이할 형편이 못 되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고, 좋은 날씨조차 ‘내 속을 뒤집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면 우울증이 아닌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봄이라 그렇겠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무기력감은 아파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몸이 보내는 신호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해서 내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다. 새봄을 맞으며 지난 추운 겨울을 이겨낸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면 어떨까.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속삭여보자. 견디기 힘든 무기력감을 떨쳐낼 소소하지만 확실한 보상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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