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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8 17:40 수정 : 2019.08.29 15:22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료실에 들어온 그녀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평소 감정표현이 크지 않은 분이라 당혹감과 안타까움이 크게 느껴지는 중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즉각 사과한 뒤 그 뒤의 이야기들을 계속 들었다. 그녀는 대인관계 문제로 병원에 찾아왔었다. 조금만 지나도 후회할, 잘못된 만남을 반복하던 그녀는 지난 수십차례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 생겨난 애정 결핍이 그 원인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변하겠다고 굳게 다짐한 지난번 상담 후 일주일, 그사이에 과거를 그대로 반복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자신은 변할 수 없고 치료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여기서 ‘문학’을 ‘정신과 진료’로 바꾸어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진료를 통해 과거 실패 원인을 알아챘음에도 또 반복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이 뼈저린 실책은 진정한 변화의 밑거름이 된다.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당신은 분명히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그 과정의 일부이다. 정신과 치료는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이어서 설명했다. 쓴웃음이 나와버렸던 이유를. “이제는 정말 사람을 안 만나겠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이다. 알프레트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은 전부 대인관계에 기인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인관계란 것이 없다면, 혼자만의 세상에 산다면 고민 없이 편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혼자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혼자인 개미가 없듯, 사자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듯,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겐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삶은 필연적으로 우울과 불안을 불러온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그 과정 중에 힘들고 상처받을 수 있지만, 결국 깊어진 관계에선 혼자일 때 느낄 수 없는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받으면서도 계속 도전한다. 혼자로 살겠다는 다짐을 들려주었던 그들 중 대다수가 그 후 어느 날엔 멋쩍게 웃으며 말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이번 친구는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인생은 롤플레잉 게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물론 개개인의 난이도가 다르지만, 보통 마지막 장면을 보기까지 한번의 좌절도 없을 수는 없다.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유독 어려운 스테이지가 꼭 있는 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뒤 포기해버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이미 거쳐간 사람들의 해설집을 참고하며 재도전해도 또 실패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이전보다 더 잘했고, 언젠간 뛰어넘는다. 예상치 못했던 방식의 길이 열리곤 한다.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가 있다면 더 수월하게 극복한다.

사람을 피하며 계속해서 혼자만의 힘든 싸움을 이어 나가는 분들께는 이렇게 말씀드리곤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사람인 저와 이야기 나누러 오지 않으셨냐고.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사람의 숙명임을 인정하자고. 그리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며 가까워져 가는, 다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과정, 이미 여기서 해내지 않으셨냐고. 진료실 밖에서도 다시 시작하실 때라고.

결국엔 사람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혼자가 되어도, 결국 해답은 또 사람에 있다. 더 이상 쉽게 상처받지 않도록 단단해지는 것 역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는 힘을 통함이다. 상처받은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이 간단한 진실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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