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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8 18:09 수정 : 2019.12.19 02:06

김지용 ㅣ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믿을 수가 없다. 2주 후면 올해가 끝이라니. 진료실에 찾아오는 모든 분들이 이맘때면 지나간 한해를 돌아보고, 그중에서도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한해가 끝났다는 생각에 우울해지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이분들로부터는 평소에도 공통적으로 듣는 몇가지 말들이 더 있다.

‘다들 공부 잘하고, 취직 잘하고, 승진 잘하고, 연애·결혼 잘하고, 잘 사는데 나만 부족한 것 같다’라는 말. 이 인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병원에서까지 이런 생각에 시달리신다.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다른 환자분들과도 비교를 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저보다 힘든 사람은 있겠지만, 그래도 저만큼 한심한 사람은 잘 없죠?”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저와 다르게 번듯해 보이더라고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그래서 항상 자기비난과 그에 이어지는 우울감을 지닌 이분들께는 종종 ‘칭찬일기’ 적어 보기를 권유드린다.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잘한 것을 매일 세개씩 적어 보기. 정말 간단한, 별 의미 없어 보이기 쉬운 일이지만 꾸준히 시행할 경우 평생의 습관처럼 자리 잡힌 지나친 자기비난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도구다. 하지만 정말 1분이면 충분할 것 같은 그 숙제가 평생 스스로를 혼내기만 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은가 보다. 세개를 채우지 못하는 일은 너무 흔하고, 고민 끝에 결국 빈칸으로 오시는 경우도 있다.

누구의 삶에도, 어떤 날에도 칭찬할 것, 세개씩은 매일 있다. 우울증으로 식욕 없는 와중에서도 밥 챙겨 먹었고, 의욕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나 일을 꾸준히 시도했다. 사실 진료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크게 칭찬할 일이다. 질병의 다양한 증상들은 계속해서 치료를 피하게 만든다. 앞으로 낫지 않을 것 같다는 무망감, 길거리의 사람들만 봐도 올라오는 불안, 침대에서 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무기력, 유치원 숙제 같은 이상한 일기 쓰기나 시키는 치료자에 대한 회의감까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곳에 와 있지 않은가. 이런 말을 드리면 ‘그것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요, 칭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는 대답이 매번 돌아온다. 당연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당연한 걸 해낸 것은 칭찬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어쨌든 내가 노력해서 해낸 것들에 나 스스로를 잠시 칭찬해줘도 되지 않을까?

지금 이 글을 보는 당신의 2019년은 어떠했는지? 완벽으로만 가득 찬 시간을 보낸 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많이 부족한 기간이었다. 올해 내내 나를 찾아왔지만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올해 봄 동료들과 야심차게 시작한 뇌부자들 유튜브 채널은 팟캐스트 때와는 달리 애초 기대에 못 미치는 호응을 얻었다. 병원 일에 추가로 뇌부자들 활동을 하느라 어린 아이들과도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반가운 연락들에 제때 답장도 하지 못해 지인들과의 관계도 많이 소원해졌다. 멤버들 모두 본업이 있는 도중에 무리하며 지쳐가는데, 성과가 별로라면 이 활동을 계속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분명 부족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호전된 후 웃는 얼굴로 진료를 종결한 사람들 또한 많았다. 아직도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선생님 덕에 잘 이겨내고 있다는 고마운 분들 또한 계시다. 뇌부자들 채널은 다행히 최근 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있으며, 종종 눈에 띄는 악플보다 선플이 훨씬 더 많고, 덕분에 큰 도움을 얻었다는 감사 인사들도 보인다. 이렇게 신문 지면상으로도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역시 작년까지는 없었던,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물론 지난 한해가 너무도 최악의 기간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한 기억들만 떠오르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분명 힘든 기억들도 눈감지만 말고 바라봐야 한다. 실패를 바탕으로 더 발전해 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이루지 못한 것에만 집중한다면 영원히 힘들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지난 1년을 잘 돌아보자. 주의를 기울여 일부러 찾아보자. 좋았던 순간이, 성취한 것이, 힘든 와중에 결국 지켜낸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수고했다고 말하며 스스로 칭찬해주자. 그러면 올해가 최고의 해나 최악의 해가 아닌, 충분히 좋았던 한 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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