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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8 05:59 수정 : 2019.11.08 20:39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에밀 테셴도르프(Emil Teschendorff)의 1892년 작품. 안티고네의여동생 이스메네는 크레온의 명령에 복종하여 ‘살아남는 길’을 택하지만, 안티고네는 죽음을 불사하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를 택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⑦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칠 수 없는 노래

떠난 이들이 만들지 못한 세상을 완성해내려는 끝없는 혁명의 몸짓
애도의 자리를 대체한 문학은 상처입은 자들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에밀 테셴도르프(Emil Teschendorff)의 1892년 작품. 안티고네의여동생 이스메네는 크레온의 명령에 복종하여 ‘살아남는 길’을 택하지만, 안티고네는 죽음을 불사하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를 택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시간이 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차마 생각하지 않으려 의식은 몸부림치지만, 무의식은 자꾸만 ‘네가 잃어버린 것들을 결코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잃어버린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의 파편들, 후회되지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과거,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난 아름다운 사람들. 이런 그림자도 없는 실체들이 밤이 되면 더욱 선연한 이미지로 떠올라, 마음속에서 그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지휘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그럴 때 난 문학작품을 읽는다. 그리하여 다시 볼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속절없는 그리움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게 문학작품을 핑계로 실컷 울어야만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하는 슬픔의 얼굴을 본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아침과 눈부신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일지라도, 문학의 상징적 시간은 항상 밤인 것 같다. 그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며 홀로 슬퍼하는 밤이야말로 문학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이니까. 낮에는 의식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생을 움직이게 한다면, 밤에는 낮에 풀어내지 못한 무의식의 억눌린 열망이 미처 이승을 떠나지 못한 서글픈 원혼들처럼 다시 돌아온다. 그 억눌린 목소리는 바로 우리가 잃어버렸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는 과거의 절규, 혹은 망자의 흐느낌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런 잃어버린 존재들을 보살피고 쓰다듬을 마음자리가 필요하다. 상실의 빈자리를 다독이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아니다.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분명 더 크고 깊은 존재로 성장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우리는 더욱 알록달록한 세상의 차이들을 품어안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문학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 사랑과 사람과 세계를 되찾는다. 애도는 단지 수동적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떠나간 자들이 미처 만들지 못한 세상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마저 완성해내는 끝없는 혁명의 몸짓이기도 하다.

안티고네와 애도의 권리

문명화를 거부한 원시부족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상실에 대한 애도야말로 인류의 근원적 열망임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당사자 혼자만이 아니라 부족 전체가 몇 년간 애도 기간을 가진 부족도 있고, 젊은 여인이 단지 실연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그가 실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사랑을 찾을 때까지 함께 슬퍼해주던 옛 부족의 이야기도 있다.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를 보듬고 쓰다듬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마음자리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안티고네의 슬픔이야말로 수천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절절히 이해할 수 있는 원초적 상실의 고통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내게 머나먼 옛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평생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기만 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는 안티고네에게 버럭 화가 나다가도, 그녀가 겪어야 했던 무시무시한 상실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몸을 던진 바로 그 아픔에 더 공감하게 된다.

어머니 이오카스테에 이어 아버지 오이디푸스마저 여의고, 누더기처럼 산산조각 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오빠들까지 정치적 이유로 서로 싸우다 죽은 것을 발견한 안티고네. 안티고네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크레온이 장례조차 금지시킨 오빠의 시체가 까마귀 밥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을 결코 두고 볼 수가 없다. 국법으로 금지된 장례를, 안티고네는 기어이 홀로 치르고야 만다. 그를 묻어주면 사형에 처하리라는 왕명까지 어기고, 안티고네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혼자라도 슬퍼할 권리를 지켜냄으로써, 독재자의 서슬 퍼런 권력에 숨죽여 신음하던 테베의 민중들에게 진정 떳떳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 일찍 잃어버린 한 소녀가 죽음을 불사하고 지키고자 했던 권리, 즉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의 처절한 권리를 일깨운다.

영원히 잃은 것을 애도하게 하는 문학

애도를 위한 집단의 원시적 제의가 사라진 지금, 현대인은 문학작품으로 그 잃어버린 제의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 전 <톨킨>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기대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었기에 나는 그저 톨킨이라는 위대한 작가에 대한 오마주 같은 작품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테마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톨킨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이나 천재성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톨킨을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가 잔인무도한 전쟁을 통해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을 말하고 있어서 좋았다. 톨킨의 친구 제프리는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톨킨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어떤 이유로든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면 너무 괴로울 거야. 그런데 시인들의 눈에는 그런 사랑만이 가진 아름다움이 보이지. 현실의 장벽으로 인한 때가 묻지 않은 그런 사랑. 언제나 처음처럼 깨끗하고 강렬한 것이 그런 사랑의 아름다움인 거야.” 이토록 따스한 시인의 위로를 받은 톨킨은 다시 떨쳐 일어나 사랑을 찾고, 다시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내 못남과 어리석음을 다 알면서도 그 모자람조차 나를 더 사랑해줄 이유로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런 친구를 평생 어떻게 한순간인들 잊을 수가 있겠는가.

윌리엄 헨리 라인하트(William Henry Reinhart),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에 헌주를 따르는 안티고네>, 1867~70. 스미스소니언아메리칸아트 뮤지엄 소장

나는 톨킨의 천재적인 언어감각이나 신화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영화를 상상했는데, 이 영화는 고아나 다름없이 외롭게 자란 톨킨을 둘러싼 친구들의 우정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제프리는 불타는 연애를 경험하여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모두가 고통받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에, 문학은 더욱 의미가 있다. 내가 지친 마음의 닻을 내리고 내 안의 결핍과 갈망과 그리움의 크기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문학의 힘 덕분이다. 이토록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의 시대에야말로 한 사람의 영웅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또 다른 영웅적 용기를 이야기하는 문학의 언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한없이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우정을 통해 숨겨왔던 자신의 눈부신 가능성을 깨닫는 이야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죽은 오빠의 시신에 홀로 술을 따라주는 안티고네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겪어본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스미스소니언아메리칸아트 뮤지엄 소장

모든 상처입은 자들의 마지막 보루

이렇듯 문학은 끊임없이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바로 지금 여기로 생생하게 불러오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제주 4·3을, 1980년 광주를, 세월호를, 끊임없이 문학의 거울을 통해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또렷이 그날의 그 아픔을 기억하는 한 책임자들은 영원히 그 사건의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할 것이며, 떠난 이들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끝내 보듬고 부둥켜안고자 하는, 그 모든 상처입은 자들의 마지막 보루다. 문학은 우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시간 속으로 초대하여 이야기의 반딧불로, 은유와 상징의 횃불로, 우리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한다. 잃어버린 존재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결코 부질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해야만 나는 진정 나일 수 있었으므로. 그때 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나일 수 없을 것이므로.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들을 문학의 반딧불로 비춰보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존재들을 기억의 찬란한 무대로 부활시키는 힘이다. 나는 잠 못 이루는 밤 내 곁을 꺼지지 않는 등잔처럼 밝혀주는 문학을 통해 매순간 발견한다. 상실을 통해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통해 더 깊고 크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가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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