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22 05:00
수정 : 2019.05.2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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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호수공원 안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상징물.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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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10주기 ‘네 도시 이야기’
③세종: 균형발전의 밑돌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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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호수공원 안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상징물. 박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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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탄 이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따른다. 사람들 앞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세종시 세종호수공원 한쪽에 놓인 상징물이다. 공원은 정부세종청사 남쪽에 마련돼 2012년 12월 일반에 개방됐다.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탄 이가 상징하는 인물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사람 사는 세상’이 (서거 10년인 지금에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네요.” 20일 낮 세종호수공원에서 이 상징물을 사진으로 담던 곽진환(54)씨가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꿈이 담긴 세종시가 그저 공무원들의 도시가 되고, 아파트나 부동산 투자의 대상으로만 거론되는 현실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세종시는 노 전 대통령이 만든, ‘노무현의 도시’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노 전 대통령의 추모제가 열리는 세종호수공원엔 ‘세종시는 노무현입니다’라고 쓰인 펼침막이 걸린다.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을 지낸, 세종시의 ‘실질적 설계자’라 할 이춘희 세종시장은 이에 대해 “국가균형발전이란 큰 뜻을 품고 위헌 결정이라는 절체절명의 역경을 극복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되살려낸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담긴 글귀”라고 했다.
생전의 노 전 대통령은 세종시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는 자서전 <운명이다>에 “나는 세종시를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축소 모형을 만들어 가까이 두고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재임 중에는 기공식밖에 하지 못했지만 완공되면 자주 가볼 생각이었다”라고 썼다. 하지만 정작 세종시에는 노 전 대통령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 많지 않다. 지금의 어진중학교 앞터 정도다. 세종시가 그의 사후 3년여 뒤인 2012년 7월에야 출범했기 때문이다. 생전의 그가 이곳을 다녀간 공식 기록은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7월20일 행복도시 건설 기공식인데, 행사가 열린 곳이 바로 지금의 어진중학교 앞이다.
세종에는 노 전 대통령의 발자취는 거의 없지만 그와 관련된 장소는 호수공원 말고도 여러 곳이 있다. 6대 장관(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을 지낸 해양수산부와,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관련 법을 제정하고 설립한 대통령기록관이 세종에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장관이던 시절 해수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었고, 대통령기록관은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12월 경기도 성남의 국가기록원 서울기록관에 설치됐다가 2016년 세종시에 청사를 지어 옮겨왔다. 대통령기록관은 특히 후임인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시작된 계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저서 집필을 위해 본인의 기록물 사본을 경남 봉하의 사저로 가져갔는데, 이를 이 전 대통령과 여당인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가기록물을 빼돌린 사건으로 호도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과 세종시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그의 운명만큼이나 세종시 역시 갖은 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세종시의 시작은 2002년 9월로 거슬러 간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신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다. 당선 뒤 2003년 4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이 활동에 들어갔고 6월에 관련 법이 만들어져 그해 말 국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7월 중앙정부의 18부 4처 3청 등 74개 기관을 이전 대상으로 선정했고 8월엔 입지가 정해졌지만 곧 풍파를 겪었다.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의 동의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위헌으로 결정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후 후속대책위를 꾸렸고 2005년 3월 청와대와 국회, 법원과 국가안보 관련 기관 등을 이전 대상에서 제외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이전 기관은 애초 계획보다 축소된 12부 4처 3청 등 49개로 줄었다. 행정도시특별법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이 제기됐지만, 재판관 10명 중 7명이 이를 각하했다.
그 뒤 2006년 1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출범했고 그해 말 국민 공모로 도시 이름이 ‘세종’으로 정해졌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왕의 호칭이자 한자로 ‘세상의 마루(꼭대기)’란 의미였다. 2007년 7월 행복도시 기공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부 부처는 모두 이곳으로 오는 게 순리다. 청와대도 그 좋은 녹지를 서울 시민에게 돌려주고 이곳에 와서 자리잡는 것이 순리이며, 국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세종시는 위기를 맞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뒤 행정도시 건설을 백지화하려 했고, 노 전 대통령 서거 이듬해엔 중앙부처 이전을 백지화하고 기업도시로의 전환을 담은 세종시 수정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하지만 충청권 표를 의식한 한나라당 박근혜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7월 출범한 세종시는 현재 인구 33만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
세종시는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꿈이 서린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11월 대선 후보 시절 세종시 유세 때 한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세종시를 통해 수도권으로 집중된 인구와 자원을 지방으로 분산해 지역 간 불균형을 균형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이는 그가 정치 활동 내내 맞서 싸운 지역주의와도 연결돼 있다. 지역주의의 근본 원인 가운데엔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이 있었고, 그는 국토의 균형발전을 지역주의를 없앨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공부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돈과 자원과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계속되면 헌법이 명한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정치적 손익 계산에 의거해 신행정수도 건설 공약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다. 국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정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난관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밝힌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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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의 정부세종청사. 행정도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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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뿌린 균형발전이란 씨앗은 싹은 틔웠지만 세종시 출범 7년이 돼가는 지금, 꽃을 피우진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세종시와 10개 혁신도시 건설에 따라 한때 주춤했던 인구와 생산의 수도권 집중 현상이 다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선 청와대와 국회 등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는 핵심 기관들을 세종시로 이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종에는 이들 기관의 이전에 대비한 ‘유보지’가 정부세종청사 지구 북동쪽에 있는 총리 공관 주변에 이미 마련돼 있다.
박재율 지방분권전국연대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지방분권과 더불어 국가 균형발전을 국정의 핵심 의제로 삼은 것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일”이라며 “입법부의 심장인 국회와 대통령이 업무를 보는 청와대가 완전히 이전해야 진정한 의미의 수도 이전이 이뤄질 수 있고, 그래야 수도권 중심에서 탈피해 지역 균형발전이 한 단계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꾼 국가 균형발전의 꿈은 그의 서거 10년이 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종/박기용 최예린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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