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최근 들어 몇차례 ‘거리상담’이란 걸 했다. 여러 단체가 분야를 나눠 맡았다. 한번은 영구 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를 폈다. 눈에 띄게 중년층, 노년층이 많았다. 도서관에도, 사회복지관에도, 체육시설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70~80대였다. 20년 전 외환위기 무렵 입주하여 빈곤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한창 상담을 이어가던 중, 두분이 연이어 같은 것을 물었다. ‘유언장 쓰는 법 좀 알려줄 수 있는가?’ 꺼림칙한 마음에 답을 못 하고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몇번의 선문답을 거치니 속마음이 열린다. 몸이 너무 아프다. 병원도 한두번이지, 나아지는 게 없다. 모아둔 돈도 빌려주고 말았다. 가족 같은 지인에게, 그것도 현금으로. ‘한달에 5만원씩이라도 꼭 갚는다더니….’ 판사 시절 수도 없이 봤던 사건이다. 소송하라는 조언도 하기 어렵다. 내 손으로 ‘입증 부족’이라며 원고를 패소시킨 사건 수가 얼마던가. 80대 노인은 결국 눈물을 보인다. 나는 속으로 짐작을 한다. 유언장을 물어본 게 그런 뜻이었구나. 보름 전 동대문구에선 노인 부부가 투신을 했다. 남편은 심장 질환, 아내는 위암이었다.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위다. 오랫동안 1위였다가 한 계단을 내려왔다. 작년에 오이시디에 가입한 리투아니아 덕분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라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노인 자살률은 압도적인 1위다. 2위의 1.5배, 평균치의 3배다. 청소년 자살률도 높은 편이다. 자살 이유는 다양하다. 우울, 불안, 고립, 외로움, 주거불안정, 치료받지 못한 신체적 고통…. 노인 빈곤율 역시 오이시디 가입국 중 단연 1위다. 평균치의 3배다. 65살 이상 인구의 20%가 우울증을 겪고 그 절반이 자살을 생각한다는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도 있었다. 부모 세대의 빈곤과 불안정은 부모 자식 관계의 불안정으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에 대물림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경제적인 불평등의 문제가 있다. 수십년째 임금 증가가 국내총생산(GDP) 증가를 큰 폭으로 밑돌고 있다. 반면 서울 강남의 은마아파트 가격은 지난 20년간 10배가 뛰었다. 전세계가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제 불평등을 완화할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중 가장 핫한 이슈는 단연코 ‘기본소득’이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최저임금을 넘지 않는 기본소득을 주자는 논의다. 자동화와 인공지능(AI)으로 인해 논쟁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일자리가 급속도로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택배기사, 마트 계산원, 전화교환원 등이 모두 같은 운명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운수업 종사자가 많다. 100만명을 거뜬히 넘는다. 이들이 일자리를 잃기 시작하면 그 타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심판의 날이 다가올수록 방주를 만드는 손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을 실험하는 나라가 꽤 된다. 가령 핀란드는 중앙정부가 2017년부터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해봤다. 지금은 그 결과를 두고 다각도로 평가 중이다. 일단 고용률은 큰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재취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도 지지가 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 테슬라 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등도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근 3년간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연속해서 줄었다. 100년 만에 처음이다. 기대수명 감소의 원인은 우리의 자살 원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런 흐름을 타고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있다. 앤드루 양이라는 대만계 미국인이다. 핵심 공약은 기본소득이다. 재원 조달도 계산해봤다고 한다. ‘트럼프의 반대말은 수학 좋아하는 동양인’, 이것이 그의 캐치프레이즈다. 지금도 알래스카에선 원유산업으로 창출된 이익 일부를 주정부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한다. 최근엔 1인당 대략 100만원 정도 된다.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30여년 전에 시작한 정책이다. 같은 취지의 정책을 미국 전역으로 넓히자는 게 앤드루 양의 주장이다. 그로 인한 기대효과는 노동시간 단축, 가족관계 개선, 가정폭력 감소, 정치참여 증가 등이라고 한다. 지난 5월 그의 지지율은 1%였다. 이후 점점 상승하더니 지난주 캘리포니아 일부 조사에선 드디어 7%를 찍었다. 그의 대안이 한국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자살률을 낮추고 나아가 출산율까지 높일 수 있을까. 미국이 실험에 착수하는 걸 보고 싶다. 가슴 아픈 유언장 상담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
칼럼 |
[이탄희의 공감(公感)] 유언장 쓰는 법을 묻는 사람들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최근 들어 몇차례 ‘거리상담’이란 걸 했다. 여러 단체가 분야를 나눠 맡았다. 한번은 영구 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를 폈다. 눈에 띄게 중년층, 노년층이 많았다. 도서관에도, 사회복지관에도, 체육시설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70~80대였다. 20년 전 외환위기 무렵 입주하여 빈곤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한창 상담을 이어가던 중, 두분이 연이어 같은 것을 물었다. ‘유언장 쓰는 법 좀 알려줄 수 있는가?’ 꺼림칙한 마음에 답을 못 하고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몇번의 선문답을 거치니 속마음이 열린다. 몸이 너무 아프다. 병원도 한두번이지, 나아지는 게 없다. 모아둔 돈도 빌려주고 말았다. 가족 같은 지인에게, 그것도 현금으로. ‘한달에 5만원씩이라도 꼭 갚는다더니….’ 판사 시절 수도 없이 봤던 사건이다. 소송하라는 조언도 하기 어렵다. 내 손으로 ‘입증 부족’이라며 원고를 패소시킨 사건 수가 얼마던가. 80대 노인은 결국 눈물을 보인다. 나는 속으로 짐작을 한다. 유언장을 물어본 게 그런 뜻이었구나. 보름 전 동대문구에선 노인 부부가 투신을 했다. 남편은 심장 질환, 아내는 위암이었다.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위다. 오랫동안 1위였다가 한 계단을 내려왔다. 작년에 오이시디에 가입한 리투아니아 덕분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라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노인 자살률은 압도적인 1위다. 2위의 1.5배, 평균치의 3배다. 청소년 자살률도 높은 편이다. 자살 이유는 다양하다. 우울, 불안, 고립, 외로움, 주거불안정, 치료받지 못한 신체적 고통…. 노인 빈곤율 역시 오이시디 가입국 중 단연 1위다. 평균치의 3배다. 65살 이상 인구의 20%가 우울증을 겪고 그 절반이 자살을 생각한다는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도 있었다. 부모 세대의 빈곤과 불안정은 부모 자식 관계의 불안정으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에 대물림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경제적인 불평등의 문제가 있다. 수십년째 임금 증가가 국내총생산(GDP) 증가를 큰 폭으로 밑돌고 있다. 반면 서울 강남의 은마아파트 가격은 지난 20년간 10배가 뛰었다. 전세계가 이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제 불평등을 완화할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중 가장 핫한 이슈는 단연코 ‘기본소득’이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최저임금을 넘지 않는 기본소득을 주자는 논의다. 자동화와 인공지능(AI)으로 인해 논쟁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일자리가 급속도로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택배기사, 마트 계산원, 전화교환원 등이 모두 같은 운명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운수업 종사자가 많다. 100만명을 거뜬히 넘는다. 이들이 일자리를 잃기 시작하면 그 타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심판의 날이 다가올수록 방주를 만드는 손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을 실험하는 나라가 꽤 된다. 가령 핀란드는 중앙정부가 2017년부터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해봤다. 지금은 그 결과를 두고 다각도로 평가 중이다. 일단 고용률은 큰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재취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도 지지가 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 테슬라 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등도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근 3년간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연속해서 줄었다. 100년 만에 처음이다. 기대수명 감소의 원인은 우리의 자살 원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런 흐름을 타고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있다. 앤드루 양이라는 대만계 미국인이다. 핵심 공약은 기본소득이다. 재원 조달도 계산해봤다고 한다. ‘트럼프의 반대말은 수학 좋아하는 동양인’, 이것이 그의 캐치프레이즈다. 지금도 알래스카에선 원유산업으로 창출된 이익 일부를 주정부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한다. 최근엔 1인당 대략 100만원 정도 된다.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30여년 전에 시작한 정책이다. 같은 취지의 정책을 미국 전역으로 넓히자는 게 앤드루 양의 주장이다. 그로 인한 기대효과는 노동시간 단축, 가족관계 개선, 가정폭력 감소, 정치참여 증가 등이라고 한다. 지난 5월 그의 지지율은 1%였다. 이후 점점 상승하더니 지난주 캘리포니아 일부 조사에선 드디어 7%를 찍었다. 그의 대안이 한국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자살률을 낮추고 나아가 출산율까지 높일 수 있을까. 미국이 실험에 착수하는 걸 보고 싶다. 가슴 아픈 유언장 상담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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