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1938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터 베냐민.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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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지음, 심철민 옮김/도서출판 b(2017)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황현산 옮김/길(2010) 서른아홉이 되어서야 나는 철학을 접했다. 눈 내리던 어느 겨울밤, 낡은 형광등 아래에서 철학수업을 처음 들었다. 그날 만난 첫 철학자는 발터 베냐민. 공부가 부족했던 내게 텍스트는 황막한 기호로 다가왔다. 그러나 설렘에 속았는지 수업 현장만큼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그제야 정신의 서까래가 제대로 끼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 내 궤적을 생각하면 그 날 그 강의실은 기묘한 아우라(aura)로 빛난다. 그리스어로 아우라는 ‘미풍’, ‘시원한 아침 바람’ 같은 공기의 움직임이다. 베냐민은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가까이 있더라도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것의 일회적인 나타남”. 어린 시절 우뚝 솟은 명동성당과 제단 앞에 처음 섰을 때, 금세 공기가 바뀌었는지, 순간 독특한 분위기를 느꼈다. 유일무이한 진품은 지금-여기 가까이 있어도, 저 멀리 있는 신비와 권위가 흘러나와 내 몸을 한 바퀴 돌아나간다. 그것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멀다. 그러나 베냐민은 이 아우라가 마침내 붕괴했다고 선언한다. 영화와 사진은 기술적으로 새로운 복제시대를 연다. 필름에 맺힌 상은 반영구적으로 복제된다. 처음 인화된 사진과 다음 사진 사이에 차이가 없으니 진품도 없다. 창조성, 천재성, 영원성이 예술의 힘이 되던 시절은 어느덧 옛날이다. 전통의 아우라는 부스럼처럼 벗겨졌다. 또 클로즈업, 슬로모션, 트래킹과 패닝 같은 영화 기법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을 외과수술처럼 도려내 보여준다. 몽타주(montage)는 도려낸 영상 파편들을 새로운 법칙으로 꿰어낸다. 그러자 이 몽타주가 다른 상상, 다른 감각을 외치거나 재잘거렸다. 베냐민의 표현처럼 현대예술은 감옥 같은 세계를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버렸다. 베냐민은 아우라의 세계에서 대중은 예술작품 속으로 침잠하지만, 아우라가 붕괴한 현대의 대중은 예술작품을 자기들 속으로 침잠시킨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채플린 영화를 가까이 두고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면을 도려내 디지털 이미지로 변형하기까지 한다. 예술작품이 대중 사이로 비처럼 내리고, 대중은 그 작품들에서 원하는 것을 조금씩 뜯어내 각자의 작품으로 몽타주 한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이제 우리가 만든 작품, 우리가 다니는 장소처럼 일상의 아우라가 때론 전투적이고, 때론 유쾌하게 귀환한다. 우리 눈길이 닿자, 청맹과니 사물들도 시선을 열고 응답한다. 그것들이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에 우리의 통찰이 열린다. 전통의 아우라가 무너진 자리에 천 개의 새 아우라가 꽃피는 것이다. 물론 명품 브랜드나 스타 시스템처럼 자본의 유사 아우라도 호시탐탐 영토를 노린다. 그러나 엄혹한 자본주의 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이 열반처럼 피어오른다. 아마 프롤레타리아란 이 열반으로 들어선 자들일 것이다. 베냐민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거대 사회장치에 대항하는 감각을 훈련한다. 그것은 상상과 신체를 바꾸고, 마침내 나와 공동체를 다르게 몽타주 한다. 디지털과 함께 전통적인 지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내가 만난 철학이 바로 그랬다. 철학은 현실의 곤란에 버둥거리던 나를 ‘예술작품으로서 나’로 만드는 삶의 몽타주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찾아간 첫 철학수업은 새 아우라가 막 피어나는 급진의 현장이었나보다.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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