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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는 것을 알고서도 하려는 사람 |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집 잃은 개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글항아리(2012)
공부하던 연구실에서 나는 이주노동자 미누씨를 처음 보았다. 가끔 그가 해준 밥을 함께 먹었다. 그때 그가 지나가듯 내게 말했다. “저도 여기 사람들처럼 살아요.”
노회찬은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계속 초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또 전태일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나의 또 다른 나들이여.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리링의 초탈한 문체로 <논어>를 따라 읽으며 내내 이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공자처럼 자기가 바라는 삶대로 지금 여기서 살아내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다.
어느 문지기가 말하길, 공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이다. 사실 공자는 실패한 사람이다. <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 제자들을 놓쳤다. 정나라 사람이 공자를 찾던 제자 자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마는 요임금, 목덜미는 고요, 어깨는 자산과 같고, 허리 아래는 우임금보다 3치 정도 모자라더이다. 피곤에 지친 모습이 마치 집 잃은 개(喪家之狗) 같았습니다.”
리링 말대로 당시 귀족이 아니었던 공자는 귀족보다 더한 귀족으로 살면서 귀족의 문명을 다시 일으키려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 잃은 개로 비칠 뿐이다.
출발부터 끝이 불시착임을 아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는 비관주의자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돌며 자신의 비전을 말하고 또 말한다. 비관주의자는 그런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 그럼 그는 숙명론자인가. 아니다. 숙명론자라면 할 수 없음을 아는 순간 일체의 바람을 거두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정 나라 사람의 저 말을 전해 들은 공자의 반응은 기묘하다. “외모에 대한 말은 틀렸다. 그러나 집 잃은 개 같다는 말은 맞다, 맞아”라며 흔쾌히 웃는다. 그는 성인 같다는 겉모습 평가는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집 잃은 개라는 비웃음은 인정한다. 마치 삶이란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기묘한 명랑성은 이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도 끝이 죽음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지금-여기를 살아내지 않는가. 우리는 처음부터 삶의 종착점이 거대한 실패임을 알면서도 기어코 발걸음을 내디딘다. 안 되는 것을 알고서도 하려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실패는 묘한 실패다. 공자는 “차라리 점을 치지 않겠다(不占而已矣)”라고 말한다. 한결같지 않으면(不恒)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으니, 점을 쳐 결과를 안들 소용없다는 뜻이다. 모든 결과는 한결같은 마음과 함께한다. 죽음도 한결같이 살아내는 마음과 나뉘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반전이 일어난다. 끝나고 나서야 어떤 모양인지 분명해지는 실패. 출발점에 알던 그 끝이 그제야 완전히 다른 전모로 드러난다. 새로운 길을 여는 다른 끝으로. 우리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죽음이지만 정해지지도, 같지도 않다. 여기서 보면 같은 끝이지만, 저기서 보면 다른 시작이다. 그래서 군자는 정해진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 그는 늘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노회찬은 이런 말도 했다. “스승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다른 나들’ 서로에게 생각할 것을 생각하라고 외쳐야 할 때다. 한결같아야 진정 달라진다고 외쳐야 한다. 이방인 미누는 우리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 않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했다. 군자란 바라는 삶대로 살아내는 사람이다.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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