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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9 04:59 수정 : 2019.11.29 20:12

[책&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공통체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사월의 책(2014)

나는 몇몇 친구와 함께 매주 한 권씩 현대 소설을 읽은 적 있다. 한 사람은 작가, 다른 한 사람은 그 작가의 시대, 또 어떤 사람은 소설의 배경과 주인공을 조사해 왔다. 모이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서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숨겨진 장면들이 살아나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각자 내놓은 것들을 향유하면서, 동시에 뭔가를 생산하고 있었다.

네그리와 하트라면 우리가 그때 누리고 생산하던 것을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이란 공기, 물, 땅의 결실을 비롯해 자연이 주는 모든 것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 중에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거나 무엇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들, 즉 지식, 언어, 코드, 정보, 정서 등을 말한다.

공통적인 것들은 어디든 있지만 다루기는 까다롭다. 우리끼리라면 설렁탕에 소금 녹듯 술술 풀리다가도, 국가와 자본의 닻이 내리면 스르르 멈춘다. 사실 공화국은 자본의 공화국이고, 자본은 공화국의 자본이다. 역사적으로도 국민국가는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빈자 다중’을 배제하거나 종속시키며 탄생한 소유 공화국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인 것을 잘라내고 독차지하려고만 한다. 그 순간 공통적인 것은 왜곡되고 일그러진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리듬과 조직형태를 결정했던 산업공장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공장의 전통적 물질노동은 전체 경제에서 비중이 크게 줄었고, 심지어 공장 밖 비물질적 생산물이 공장으로 침투해서 지배한다. 예컨대 라이프 사이클에 대한 데이터 없이는 물질노동은 무의미하다. 이를 두고 네그리와 하트는 노동가치론이 위기에 직면했다고까지 주장한다. 즉, 노동력에 기초한 ‘산업자본주의’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일반지성에 기초한 ‘인지자본주의’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다양하다. 조반니 아리기는 그들이 은유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경험적 증거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그들이 가치법칙을 왜곡하고 노동을 거부하며 임금 노동자들을 경영자와 똑같은 착취자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진태원은 민주주의를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규정하자마자 다중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할되기 때문에 다중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모두 의미 있는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가 열어젖힌 싸움의 새로운 판본, 기본소득의 제도화는 우리를 다시 사유하게 한다. 노동자의 일반지성은 사회 전체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이 토지처럼 이미 지대(rent)였을 뿐 아니라, 그 너머에 아이, 실업자, 노인, 병자를 포함한 다중 모두에게 이 지대가 지급되었어야 했다는 것에 비로소 눈을 뜬다.

네그리와 하트는 국가와 자본의 삶권력(biopower)과 달리 다중이 사는 모습을 삶정치(biopolitics)라고 부른다. 그것은 서로를 향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우리를 생산한다. 만약 혁명이 있다면 그것은 공통적인 것과 함께하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여야만 할 것이다.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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