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8.10 09:09 수정 : 2019.08.10 09:23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③ 기술교육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여성이 트럭을 몰고 있는 모습. 채혜원 제공
지난봄 새로운 집회를 조직하는 날이었다. 약 30여명의 ‘베를린 국제 페미니스트 연합’ 회원들이 모여 집회에 필요한 역할 분배를 하는 중이었다. 회의 진행자가 “이번 데모에서 5톤 트럭 몰 수 있는 사람?” 하자 4명 정도 손을 들었다. “그다음, 사운드 기계 설치 가능한 사람?” 이번에는 8명이 손을 든다.

베를린에서 열린 여러 집회에 참여했을 때 사운드 기계가 설치된 트럭을 모는 여성을 종종 보았지만, 함께 일하는 친구 중 트럭을 몰고 사운드 시스템을 체크할 수 있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놀라웠다. 지난겨울 사무실 난방기가 고장 났을 때는 독일 친구 아네타가 공구함을 가지고 와서 문제 원인을 찾아내고 이내 고치는 걸 봤다. 수리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손쉽게 전문가를 불러 서비스를 받는 한국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이 필요한 모든 일에 큰돈과 긴 시간이 드는 독일과 정반대인 한국 간 문화 차이가 있다. 지난달 세탁기가 고장 났을 때도 수리비보다 새로 사는 가격이 더 싸서 세탁기를 새로 샀을 정도다. 독일이 ‘수공업’, ‘손기술’의 나라인 점도 주목해야 한다. 주말에 차 주인이 직접 차량을 정비하거나 수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새로운 집을 구할 때 부엌에 아무것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직접 자재를 사서 싱크대부터 주방 가전까지 설치하는 일도 일반적이다.

이런 문화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여성이 트럭을 몰거나 정비 기술자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직업교육이 뒷받침되어 있음을 느낀다. 2001년부터 매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열리는 ‘걸스데이’ 행사는 여학생이 전형적인 여성 직업 세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직업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와 함께 독일 연방정부는 학생들이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전공과 직업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상담 제공, 우수사례 발굴, 정보지 발행 등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소녀의 날'에 ‘재료시험기사' 일을 체험하고 있는 독일 학생 아멜리아(11). 소녀의 날 누리집(www.girls-day.de)
독일 역시 과제는 남아 있다. 트럭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독일 친구 핀은 나에게 “한국과 비교했을 때 트럭 면허가 있거나 공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비율이 높아 보인다는 건 이해하지만, 독일도 갈 길이 멀다”며 “최근 남동생이 배관 정비하는 직업교육을 시작했는데 교육생 중 여성은 단 한명이었다. 얼마 전 공학 관련 행사에 참여했을 때 참가자는 대부분 남자였다”고 말했다.

핀의 말은 통계가 뒷받침한다. 독일 연방고용청 자료를 보면 연금·의료 등 사회보험 의무가 있는 수학·정보통신·자연과학·공학(MINT) 영역 근로자 약 773만명 중 여성은 15.2%에 그쳤다.(2018년 6월 기준) 하지만 변화 또한 분명하다. 기술 분야의 전체 여성 전문가 비율은 18%에 그쳤지만, 같은 분야 35살 미만 여성 전문가 비율은 25.9%였다. 수학 및 과학 분야도 전체 여성 전문가 비율(39.1%)보다 35살 미만 여성 비율이 46.4%로 높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트럭을 몰거나 기계를 직접 수리하는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는 직업교육이 늘어나고, 이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지길 바란다. 최근 베를린의 한 여성센터에서 여러 수리 기술에 대해 배우는 수업을 신청했다. 나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하니까.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구호처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므로.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다이어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