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9 04:59
수정 : 2019.11.29 20:02
[책&생각 지은이와 함께하는 사람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표정훈-원주 독서 동아리 ‘서로’
[한겨레-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기획]
2008년 ‘학부모 그룹’에서 출발…회원 20여명 소모임도 ‘열심’
읽은 책 물려주지 않고 다시 사는 이유 “출판계 뿌리 튼튼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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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오전, 원주시 봉산동 ‘서로 1010’에서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와 ‘서로’ 회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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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길을 걷던 사람들이 책으로 엮였다. 만나다 보니 각자의 빈 곁이 보였다. 함께 읽다 보니 서로의 곁이 됐다. 강원도 원주에서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독서 동아리 ‘서로’가 딱 그렇다.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몇몇 학부모들이 모여 2008년 시작한 ‘서로’는 매주 목요일 오전에 만나 책과 삶을 나누는 모임이다.
“정년 퇴임 뒤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있다”는 ‘청일점’ 정해경씨를 제외하곤 주부·학원강사·타투이스트·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지닌 30~60대의 여성 2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2년 동안 ‘서로’를 이끌고 있는 전보경 회장은 “좋은 책을 읽는 것도 큰 즐거움이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이루지 못한 꿈, 이별의 아픔 등 각자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매주 한번씩‘만’ 만나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아 우쿨렐레 강습, 영어·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 학습과 사진반·등산반·커피공부반 등 다양한 소모임을 꾸려 활동중이다. 카페·문화원 등을 전전하며 만남을 이어오던 ‘서로’는 뜨거운 모임의 열기에 비례하는, 공간에 대한 허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지난달엔 ‘서로 1010’(원주시 봉산동)이라는 아지트 카페까지 냈다.
지난달 15일 오전, ‘서로 1010’은 귀한 손님을 맞아 한층 열띤 분위기였다. 올봄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한겨레출판)을 펴낸 출판평론가 표정훈 작가였다. <혼자 남은 밤…>은 책과 관련된 인물화 38점을 소재로 인문적 상상력을 더해 ‘그림에 깃들어 있을 법한 가상의 이야기’를 전개한 에세이집으로, ‘탐서주의자’로 불리는 표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 책이다. 책에 관한 책이니만큼, 책을 좋아하는 ‘서로’ 회원들은 호기심에 충만한 눈빛을 쏘아댔다.
“오랫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책에 대한 중압감에 늘 마음이 무겁다”는 회원들을 향해 표 작가는 ’자유로운 독서법’을 제안했다. 그는 “남녀가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이 타오르는 것은 매우 드문 연애 아닌가. 책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며 “도서관에 가는 것, 서점에 들르는 것, 책을 만지는 것, 책의 표지를 살펴보는 것,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것 모두 독서”라고 설파했다. 지식의 습득뿐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고 슬픔을 위로하며 놀라움과 충격을 선사하는 것이 책이며, 심지어 집안을 꾸미고 허영을 과시하는 ‘장식적 기능’까지 책의 역할임을 강조했다. “사람들 사이에 책이 있다. 그 책에 가고 싶다”는 표 작가의 말은 책이란 징검돌을 함께 디디며 인생의 달콤함과 쓴맛을 나누고 있는 ‘서로’ 회원들에게 깊숙이 와닿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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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작가는 “종이책은 사물로서의 감수성과 기억을 지니고 있다. 내가 늦가을 원주의 단풍나무 아래서 종이책을 넘긴 기억은 앞으로 계속 남겠지만, 아이폰을 스크롤한 경험은 별로 중요하게 기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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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작가가 짧은 강연을 마치자 회원들은 각자의 독서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궁금증을 쏟아냈다. “독서클럽 내에서 ‘무지’를 담당하고 있다”며 겸손하게 자신을 소개한 김동선씨는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고 있어 독서의 진입장벽이 매우 높게 느껴졌는데, 표지만 읽어도 독서라는 표 작가의 말씀에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김혜수씨는 “다른 모임에 가면 잡다한 수다에 질려 한시간만 지나도 머리가 아팠는데, 이곳에선 ‘앎에 대한 욕구’가 생겨났다. ‘50대 늘그막’에 재미있게 놀 곳이 생겨서 너무 좋다”고 웃었다. “집순이 스타일이었는데 ‘서로’를 통해 연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추정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편협하게 살았는지 알게 됐다”(이미숙),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나를 옥죄던, 뭔가에 갇혀 있는 느낌에서 벗어나게 됐다”(차경희)는 ‘고백’이 잇따랐다.
‘서로’가 읽어온 책은 그 내용과 주제, 분량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생각의 탄생> <이기적 유전자>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신영복의 <담론> <강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어려운 책을 어떻게 읽느냐” “반드시 한 권을 다 통독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표 작가는 “평생 책 한권 읽은 적이 없다고 해도 그 인생이 불행한 건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읽으면 ‘책의 그물’이 촘촘해지게 된다. 새로운 개념에 접하게 되더라도 이전에 짜놓은 그물에 걸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그냥 읽으세요’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소장 도서가 2만여권에 이르는 표 작가는 “나는 심심하면 그냥 책장에 서서 아무 책이나 골라 한 문장, 한 단락씩 읽는 놀이를 한다. 그렇게 삼십분 동안 열권 정도를 들춰보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어떤 책이 백만권 팔렸다면, 그 책은 백만명에게 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동일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각자 다른 책을 읽어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짧게 요약 정리를 하거나 책의 일부를 발췌해본다면 더욱 좋겠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대목은 ‘서로’ 회원들의 책사랑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부 학부모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회비를 모아 아이들이 같이 읽을 책을 구입하고 함께 돌려 읽는 ‘위드 북’ 모임을 몇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한 기수 모임이 끝나면 그다음 동생뻘 그룹에 책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읽은 책들은 기증을 하고 같은 책이라도 반드시 다시 산다. 출판계 뿌리가 튼튼해져야 좋은 책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진정으로 책을 애정하는 ‘서로’가 던진 근본적인 질문. “종이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정해경씨의 질문에 표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책을 사면 냄새를 맡고 만져본다. 책은 기본적으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종이책은 사물로서의 감수성과 기억을 지니고 있다. 내가 늦가을 원주의 단풍나무 아래서 종이책을 넘긴 기억은 앞으로 계속 남겠지만, 아이폰을 스크롤한 경험은 별로 중요하게 기억되지 않을 것 같다. 종이책은 계속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원주/글·사진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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