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3 06:00
수정 : 2020.01.03 10:11
[한겨레-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기획: 지은이와 함께 읽는 사람들]
‘출근길의 주문’ 이다혜-독서동아리 ‘전북 책을 읽는 시간’
3년 전 시작한 느슨한 책읽기 모임 “헐렁한 게 매력”
직장생활 고충·애환 나누다보니 어느새 “용기 얻었다”
독서동아리 ‘전북 책을 읽는 시간’(전시)은 느슨하다. 소모임 애플리케이션에서 낯선 사람들이 만났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데 어쩌다 보니 20~30대가 대부분이다. 각자 읽고 싶은 걸 읽으면 된다. 3년 전 시작했는데 책보다 술에 관심 많던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한 주에 한 번 모르는 듯 아는 사람들이 책 이야기하다 밥 먹고 헤어진다. 그 헐렁함이 매력인 동아리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소개한 책을 읽고 싶어진다. 주로 과학책이나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정준호(33·약사)씨는 이 모임을 하면서 소설책을 들었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예전에 그라면 잡지 않았을 책이다. 왜 사랑하는지 답을 찾았냐니 “무슨 느낌인지는 알 것 같다”고 웃었다. <82년생 김지영>도 읽었다. “남자로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지난달 15일, 전주시 완산구 북카페아르고. 준호씨는 죄책감이 더 들지 모를 자리에 나왔다. <출근길의 주문: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킹>을 쓴 이다혜 작가와 ‘전시’가 만나는 날이다. <씨네21> 기자이자 작가, 팟캐스트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20여년 직장생활을 해 온 작가의 고민과 조언을 담은 책이다. 40대, 남자들이 경력의 정점을 찍는 나이에 둘러보니 여자들은 회사에서 사라졌다. 왜일까? 어떻게 바꿀까? 이 자리에 둘러앉은 20~30대 11명의 고민이기도 했다.
원래는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그런데 고민으로 바로 직진한다. 한 재단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은 내년 업무 분장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마음이 복잡하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폭탄 돌리기 하는 시기다. 팀에서 가장 어린 여자가 떠안을 확률이 높다. <출근길의 주문>에서 “정확하게 원하는 걸 말하라”는 구절을 읽은 그는 회의 시간에 말했다. “지금 제가 처리해야 할 일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그래서 더 맡긴 어렵다고 말했어요. 후련했고요. 그런데 내가 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 게 아닌가 찝찝함이 남는 거예요. 어떻게 이 찝찝함을 없앨 수 있죠?” 이 작가가 답했다. “그 찝찝함은 없앨 수 없어요. 그런 말에 팀원들이 박수쳐주지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계속해서 내 일이 돼요. 잡일 계속하다 폭발하는 때가 와요. 많은 경우 회사를 그만두죠.”
휴직 중인 한 교사는 복직이 두렵다. “저 사람은 나한테 왜 이렇게 할 수 있지? 저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다보니 항상 ‘되바라진 애’가 돼요.” 24살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응원했다. “예를 들어, ‘어린 여자’가 취재 나가면 나이부터 묻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까지 공론화해야 할까, 고민 하게 되죠. 제가 겪었던 걸 지금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안 겪었으면 좋겠어요.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말을 하게 되기까지가 만만치 않죠. 말을 하다보면 할 수 있게 돼요.”
동료 대부분이 남성인 집단에서 일하는 한 여성 직장인은 마음 속 갈등을 털어놨다. “여자 직원이 ‘아파서 쉴게요’ 이런 말 하는 걸 몇 번 듣고 나니 여성인 제가 ‘남자를 뽑아야 오래 가지’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이 작가는 밤샘 업무가 많은 부서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줬다. 출산 휴가 끝나고 여성들은 복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밤샘하고도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노동환경 아닌가요? 위로 올라갈수록 남자가 많고 남자끼리 해오던 걸 당연하게 여겨요. 내가 일하는 업무환경을 개선하는 데 여자들이 많아지는 게 도움이 돼요. 여자직원 뽑았다가 그만 두는 경험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바뀌어요.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외로워져요.” 질문자도 “실은 외롭다”며 “회식하면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데 안 가면 욕먹고, 가면 괴롭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한 남성은 “우리 회사는 수평적인 구조라고 생각했는데 직원들 입장에선 다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진짜 달라요. 그런데 다른 걸 알기가 어려워요. 문제는 이런 걸 진짜 들어야 할 사람은 여기 오지 않는 데 있죠.” “맞다, 맞다” 웃음이 터졌다.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이 있잖아요. 여성들이 뭉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거 같아요.” 한 회원의 말에 눈초리가 쏠렸다.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대체로 여자 자리가 몇 개 안 되기 때문인 거 같아요. ‘여자 쿼터’란 말이 있잖아요. 방송만 봐도 패널은 죄다 남성이고 한 자리 여성 몫은 10대 아이돌에게 돌아가죠. 윗자리에 여자가 많아지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이다혜)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는 구체적 조언이 이어졌다. 어느 기관에서 일한다는 여성 직장인은 요즘 기분을 “허우적”이라고 표현했다. 동료랑 맘이 안 맞거나 부당한 지시를 받을 때 술 마시고 풀면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에 대한 조언은 “글을 쓰라”는 것이다. “한 친구가 자기는 원래 침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년 전 자기가 쓴 블로그를 보다 자기가 하고 싶고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하게 됐대요. 기록해 두면 내가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었고 잘 이겨냈다는 걸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요.” 책 속에 ‘직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다룬 목록에서는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가 쓴 글을 소리 내 읽는 습관을 길러보자, 내 글과 내 목소리를 들으면 남들 앞에서도 말할 수 있고 말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직장에만 매몰되지 말고 폭넓게 사람을 만나 다른 가능성들을 발견하자, 특히 여성들에게 여성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등.
대화 초반에 남자로서 죄책감이 들었다는 정준호(33)씨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여성들이 실제 회사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으니 공감이 됐다”고 했다. 직장인 이은실(37)씨는 이렇게 말했다. “용기가 나요.”
글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사진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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