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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과 유달산을 품고 있는 목포 원도심.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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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한겨레통일문화재단 공동기획]
‘항만 르네상스’ 현장을 가다
③역사·문화거점 재개발 전남 목포항
일제 강점기 전국 3대 항구로 꼽히며
원도심에 일본영사관·상점·건물들 즐비
북항·신항 뜨자 내항 원도심 시들해져
시, 원도심과 목포항 일대 재생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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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과 유달산을 품고 있는 목포 원도심.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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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 인근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주말이면 늘 인파가 북적인다. 밤마실을 나오는 주막집 초선이와 물장수 옥단이, 살진 쌀가게 주인 오카모토, 야쿠자를 누른 건달 또선이, 열애의 대명사 김우진·윤심덕, 불후의 명가수 이난영 등 개화기 인물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시선이 몰리는 이는 단연 사뿐사뿐 걸으며 귀염을 떠는 주막 팽나무집 초선이다. 초선은 “돈 번 비결이 머시여”라는 삿대질에 “술에 물 타서 팔았다. 어쩔래”라고 능청을 피운다. 100년 전 시대상을 풍자한 익살에 항구에는 밤늦게 폭소가 이어진다.
전남 목포는 1897년 개항한 항구도시다. 1905년 기선이 다니기 시작했고, 1911년과 1914년 도로와 철도가 서울까지 닿았다. 호남의 곡창에 눈독을 들인 일제는 이곳에 식민지배기관들을 설치했다. 일찌감치 유달산 아래 바닷가를 매립해 일본인 전용 거주지를 번듯하게 조성했다. 일제가 지었던 목포 일본영사관(1900·사적), 동본원사 목포별원(1905),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1921),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1929) 등은 여태껏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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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정체성을 살린 낭만항구축제에는 해마다 인파가 몰린다.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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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목포는 전국에서 3대 항구, 6대 도시로 꼽혔다. 당시 번성하던 항구 풍경은 박화성의 <추석전야>(1925)와 송기숙의 <암태도>(1979) 등에 기록되어 있다. 박화성은 여성 노동자의 눈으로 주택과 상점, 술집이 즐비한 혼마치를 별천지로 그렸다. 송기숙은 소작농들이 맞닥뜨린 경찰서와 법원 등 선창가 건물들을 위압적으로 묘사했다. 문화재청은 2018년 이 일대를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 등록문화재만 상가, 주택, 병원, 교회, 창고 등 28점을 헤아린다. 골목을 여럿 포함한 구역이 통째로 문화재 반열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목포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 쇠락을 거듭했고 산업화의 물결을 타는 데도 뒤처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낙후와 소외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군부독재 때는 정치적 이유로 차별을 받아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민 이돈삼씨는 “한때 6대 도시가 70위권까지 밀렸다. 현대 도시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목포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잊혀가던 목포는 1990년대 후반에야 기지개를 켰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과 무안국제공항 개항, 목포 신외항 건설 등이 숨통을 틔웠다. 하당택지 개발과 전남도청 이전 등으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권역 확대로 포화 상태에 이른 목포 내항은 북항과 신항에 기능을 나눠줬다. 산업물류는 대불항으로 이전하고, 자동차 수출은 신항이 맡게 됐다. 비좁던 어선 물양장과 수협 공판장은 북항으로 옮겨 갔다. 반면 내항에 목줄을 달고 있던 원도심은 이내 시들해져 갔다. 정성권 목포시 해양정책 팀장은 “24시간 술렁이던 옛 항구 부근은 언제부턴가 저녁 8시만 되면 인적이 끊기고 불이 꺼진다. 목포의 중심인 해안선~유달산 1㎞ 권역이 살아야만 도시 전체가 살아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목포시는 2014년 도시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다양성 부족을 정체성 강화로 보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목포의 특성과 역사를 간직한 원도심과 목포항 일대를 재생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도시재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생활상을 품은 목원동 역사마을 △건축문화유산이 산재한 유달동 1897년 근대거리 △영화 <1987>의 연희네 슈퍼가 있던 서산동 보리마당을 중심으로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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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목포의 상징인 삼학도.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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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과정에서 이 일대가 개화기 생활상을 재현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공간이라는 가치도 재발견했다. 초창기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주민들도 설득 끝에 뱃고동소리조합을 구성하고 만인계웰컴센터를 운영하는 등 참여로 돌아섰다. 민·관이 손을 맞잡으면서 문화재 야행, 선상 파시 재현, 낭만항구축제에 관람객이 몰리는 등 거리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선이 쏠리면서 지난 4월엔 손혜원 의원 등이 주택과 창고를 집중적으로 사들인 것과 관련해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원도심 근대거리에 맞붙은 항구와 수변은 여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해양수산부가 3년 전 목포 내항을 역사문화거점형 항만재생 대상지로 선정했지만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책과 사업의 통일성과 연계성이 없어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주민들도 “먼저 원도심 근대거리의 재생이 무르익어야 수변공간으로 연장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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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붉은 벽돌로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목포 일본영사관.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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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가 2016년 10월 고시한 목포 내항의 항만재생 면적은 8만8139㎡에 이른다. 이곳은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과 삼학도에서 가깝고,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무안공항 등에 인접해 접근성이 뛰어나다. 최근에는 국내 최장인 목포 해상 케이블카가 개통돼 줄을 서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여건이 좋다.
기본계획을 보면,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이를 수 있고, 국제·연안 여객터미널에서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전한 수협 위판시설과 항만 공유수면을 활용해 시민이 누릴 볼거리와 놀 거리를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25%에는 해양문화관광지구, 75%에는 수상관광휴양시설이 자리를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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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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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목포시는 내항의 항만재생보다 여객운송 확대에 기울어 있다. 연안·국제 터미널의 부두시설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서남해안의 관문 구실을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화물운송은 약화했지만 대형 카페리 접안과 동남아시아 항로 개설 등으로 활로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변구역과 공유수면이 포함된 내항의 재생이 자칫 대형 선박의 접안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내비친다. 김종식 목포시장은 “목포 내항의 어선과 해경은 이전했지만 제주 항로의 여객·화물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카페리 대형화와 크루즈 상시 입항 등 새로운 요구에도 대비해야 한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등 동남아 해상교류의 전진기지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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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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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어서 목포항의 재생은 3년 안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예산을 지원할 의지가 없고, 민간투자로 진행한다면 사업시행자 공모와 실시계획 인가, 지구단위 계획 등 절차를 진행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포항의 재생은 부진하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소통은 그다지 원활해 보이지 않았다. 목포시 원도심재생 전략과 해양수산부 항만 재개발 계획도 따로따로였다. 같은 지역의 사업인데도 일정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등 엇박자가 나고 있었다. 시의 한 공무원은 “지방자치단체가 도시 전체를 범위로 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우면 중앙정부가 이를 실현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현실에선 예산 배정과 사업 허가 등 권한을 쥐고 있는 국토교통부·해양수산부·문화재청을 상대하기가 버겁기만 하다”고 전했다. 해양수산부 쪽은 “항만재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내용이다. 내년에 세울 3차 항만재개발계획(2021~2030년)에 달라진 현지 여건을 반영해 면적을 조정하거나 구상을 변경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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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본원사 목포별원.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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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 협치로 사업 추진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은호 목포시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재생대학이나 마을학교에 나온 주민들의 의견과 제안은 구체적이다. 도심재생이든 항만재생이든 토지 확보나 건축 제한, 미래 경관 등에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주민들이 참여해야 시간이 절약되고 내용이 알차진다”고 조언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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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유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화재 야행은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환영을 받는 프로그램으로 정착했다. 목포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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