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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5 10:19 수정 : 2019.11.05 10:26

막내(왼쪽)와 쭈니. 씽긋 웃는 듯한 쭈니의 표정은 카메라 앞에서 한결같다.

[애니멀피플] 엄지원의 개부담

막내(왼쪽)와 쭈니. 씽긋 웃는 듯한 쭈니의 표정은 카메라 앞에서 한결같다.

‘개의 섬세함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저평가돼 있는가?’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열띤 논쟁이 펼쳐졌다. 논쟁이랄 것도 없긴 하다. 반려견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나와 회사 후배, 두 사람이 견뎌온 통한을 토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원통했다. 어느 날인가 반려동물계에서 ‘고양이’가 대세로 등극한 뒤, 개는 모든 면에서 뒤처진 존재가 되었다. 고양이는 우아하고 날렵하며, 야성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며, 까탈스러운 취향을 가진 동반자로 예찬되었고, 개는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심지어 사료만 봐도 침을 질질 흘리며) 밥 주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라도 사족을 못 쓰는, 둔해 빠진 반려동물로 폄훼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싹트고 말았다.

애니멀피플 편집장을 비롯한 ‘고양이 집사’들의 호들갑은 얼마간 우리 같은 견주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개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갓 데운 고봉밥이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찬밥보다 구수하다는 것을.

늙은 치와와 둘과 함께 하는 독신 귀차니스트의 삶은 그래서 ‘개부담’스럽다. ‘쭈니’와 ‘막내’는 저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저 내 발소리만 들어도 밥 생각에 침을 흘리는 녀석들이 아니다.

식욕은 있지만 입이 짧은 미식가들인 데다, 우리 부모님 손에 자란 어린 시절엔 사람 먹는 음식들도 얻어먹으며 자랐기 때문에 (건강을 고려한) 현재의 식단을 껄끄러워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유전자와 환경을 공유하는 모녀간인데도 둘의 섭식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도 문제다.

2주에 한번 쭈니와 막내에게 바치는 특식. 닭가슴살과 고구마, 셀러리, 브로콜리, 당근, 시금치 등이 들어갔다.

어미인 막내는 반려동물 사료의 기본값인 ‘건사료’를 좀체 먹지 않는다. 나를 닮았는지 원체 풍미가 살아있는 육류 식단을 즐기는 쪽이어서다. 건사료를 따뜻한 물에 불려 줘보기도 했지만 사료 특유의 냄새가 막내의 구미를 당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토퍼’라고 불리는, 사료에 얹어 먹는 간식을 얹어줘도 토퍼만 핥아먹고 돌아서는 얌체다.

“내 나이 열세 살,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맛없는 걸 먹느니 이만 곡기를 끊겠다”는 자세다. 이 미물들을 온종일 집에 두고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나로선 참 마뜩잖은 현실이다. 게다가 이 늙은 개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췌장이 좋지 않아 저지방식을 해야 하는 처지다. 아무 습식 사료나 줄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막내의 딸 쭈니는 입 주위에 국물이 묻는 식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건사료를 낱알로 물고 와 본인 침대에서 천천히 씹어먹길 즐긴다. 막내와 달리 채소와 과일도 좋아한다. 여름엔 수박껍질을 종잇장이 되도록 갉아먹고, 가을부턴 사과를 나와 나눠 먹는다. 삶은 고구마와 감자, 당근 같은 뿌리채소들도 좋아한다.

그리하여 쭈니와 막내, 둘의 취향을 모두 고려해 2주에 한 번 정도 끓여서 얼려두는 특식에는 닭가슴살과 고구마, 셀러리, 브로콜리, 당근, 시금치 등이 들어간다. 여생에 큰 즐거움이 없을 녀석들을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서비스다.(그 특식을 끓이는 날이면 견주인 본인은 파스타와 토마토를 추가로 넣어 주방 구석에서 끼니를 때운다.) 특제사료를 먹을 때 막내는 당근 조각들을 남겨두고, 쭈니는 커다란 당근 덩어리를 ‘득템’한 듯 씹어먹는다.

그러니 감히 누가 개에게는 취향도, 예민함도 없다고 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천만 반려견들은 천만 개의 취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앞으로는 ‘개취존중’.(개 취향 존중! 아, 이게 이 뜻이 아니던가?)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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