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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7 20:06 수정 : 2019.12.28 02:00

지난 4월1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영결식에서 조원태(왼쪽)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오른쪽 둘째)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오른쪽) 전 전무가 영정을 따라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지난 4월16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영결식에서 조원태(왼쪽)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오른쪽 둘째)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오른쪽) 전 전무가 영정을 따라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진가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성탄절을 이틀 앞둔 지난 23일 “아버지 유훈을 따르지 않고 경영을 하고 있다”며 ‘동생’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공개 비판했다. 동생이 가족 간 협의 없이 독단 경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이 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한진칼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터라, 조 전 부사장의 비판은 내년 주주총회 때 남매간 표(의결권) 대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조 회장은 취임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누나가 동생 공개 저격일을 23일로 잡은 건 내년 주총 때 표 대결의 토대가 되는 주주명부 폐쇄일(26일)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치밀하다. 임직원만 3만명에 국적 항공사 대한항공을 포함해 계열사가 32곳인 재계 13위 한진그룹이 총수 집안 싸움에 휘청이고 있다.

집안싸움은 남매의 부친인 조양호 회장이 그룹 후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지난 4월 갑작스레 세상을 뜨면서 예고돼왔다. 고인은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다. 고인이 보유한 한진칼 등 계열사 지분은 지난 10월 말에야 민법상 상속 비율대로 배우자(이명희)와 자녀(현아·원태·현민) 등 상속자들에게 뿌려졌다. 그룹 총수(동일인·그룹의 실질적 지배자)도 상속자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공정거래위원회가 직권 지정하는 과정을 밟았다. 조 전 부사장은 아직도 동생을 ‘회장’이 아닌 ‘한진칼 대표이사’라고 표현한다. 남매간 싸움에 대해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재계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한진가의 사람들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다. 실은 주요 재벌그룹 대부분이 ‘핏줄 승계’가 핵심인 총수 집안 문제에 발목이 잡혀왔다. 오늘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도 2000년 ‘왕자의 난’을 거쳤다.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간 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둘째 아들(정몽구·현 현대차그룹 회장)이 아버지가 정한 후계자(다섯째 아들·고 정몽헌)에게 반기를 들고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지난해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이 집안 사람들에게 본인의 지분 일부를 나눠 준 것도 본인의 그룹 지배력을 떨어뜨리더라도 가문 내 불협화음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효성그룹은 총수 가문 형제간 갈등이 심각해지던 중 둘째 아들(조현문)이 그룹 밖으로 쫓겨나는 일을 겪었다.

핏줄 승계는 불법과 편법을 낳기도 한다. 연말 인사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삼성전자를 경영 난맥상에 빠지게 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사기 사건’과 ‘국정농단 사건’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기업 범죄다. 이 부회장이 아버지(이건희)의 그룹 지배력을 좀더 적은 비용으로 넘겨받으려다 벌어진 일이라는 게 수사당국의 시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선주를 발행하고 그룹 내 일감을 받아 기업 가치를 높이고 다시 회사를 분할하는 등의 승계 터닦기 작업이 한창인 그룹이 여럿(한화·CJ)이다.

핏줄 승계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룹 회장을 형제들이 돌아가며 맡거나(GS·SK), 양자를 들여 회장직을 물려주는 일(LG)도 분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승계’로 받아들인다. 연말 인사 때마다 여성 임원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홍보하면서도 장자 승계 원칙(삼성·현대차·LG)은 고수하는 재벌 가문들의 이중성에 의아함을 느끼는 이들은 드물다. 아들이 여럿이어서 경영권 다툼이 컸던 여느 그룹(옛 현대·효성 등)과 달리 재계 1·2위 그룹에 외아들만 있어 ‘그나마 다행’이란 말을 사람들은 뒷담화하듯 한다.

많은 재벌그룹은 올해 ‘혁신’을 부쩍 강조했다. 30대 직원을 임원으로 발탁하고 국외 석학들을 영입했다. 똘똘한 스타트업들을 인수하거나 그런 기업에 거액을 투자했다.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와 같은 기술을 활용한 신산업에 그룹의 자원을 집중 투입한다는 발표도 잇따랐다. 내년에도 비슷한 뉴스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임직원들은 ‘혁신은 사이드, 승계가 메인’이라는 사실을 안다. 총수 집안의 승계를 챙기는 선배들이 뛰어난 상품을 개발하고 회사에 높은 수익을 가져온 이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걸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각 그룹 총수 가문이 전근대적인 ‘핏줄 장자 승계’를 놓지 않는 한 의미있는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김경락 산업팀 데스크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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