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폐지로 만든 의자에 앉아 슈퍼에서 얻은 카스텔라 빵과 두유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2020 노동자의 밥상] ⑤폐지 줍는 노인
고물수레 한가득 채워 번 5천원
“여기는 부촌이라 뭐가 많이 나와”
논현동 강남대로를 쉬지 않고 돌아
도로옆 아슬아슬…다리 치인 적도
서너차례 날라 하루벌이 1만5천원
공짜 빵 먹는 날은 ‘운수 좋은 날’
슈퍼에서 준 날짜 다 된 식품이 한끼
제대로 된 점심식사는 해본 적 없어
교회서 운영하는 공짜식당 가봤지만
“밥 다 떨어졌는데…” 결국 발길 돌려
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폐지로 만든 의자에 앉아 슈퍼에서 얻은 카스텔라 빵과 두유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강남대로 뒷골목, 180㎏ 손수레 끄는 노인 경기 시흥에 사는 박영분은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논현동으로 ‘출근’한다. 아침 7시에 시흥에서 출발해 9시께 논현동 고물상에 도착하면 일과가 시작된다. 논현동에선 돈이 되는 고물이 많이 나온다. “우리 동네는 할머니들이 하루 꼬박 주워도 4천원 번다고 하더라고. 여기는 부촌이니까 뭐가 많이 나오거든.” 지난 12월23일 아침 논현동 ㅇ자원 앞에서 만난 박영분이 말했다. 길을 나서면 박영분은 쉬는 법이 없다. 가파른 언덕길에선 작은 손수레를 끌고 오가며 폐지를 담는다. 캔이나 병처럼 작은 고물은 25㎏짜리 큰 포대에 담아 싣는다. 고물 높이가 쓰러질 정도로 높아지면 손수레에 묶인 노끈으로 폐지들을 칭칭 동여맨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은 들어가기 힘든 비좁은 골목 고샅고샅 박영분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다. 먹고 남은 맥주캔과 배달 음식 쓰레기, 택배 상자를 닥치는 대로 실으니, 박영분이 지나간 자리는 멀끔한 강남의 얼굴을 되찾았다. 이렇게 그러모은 손수레를 하루 서너차례 비운다. 고물은 1㎏당 40원. 강남대로 주변을 2시간 돌아 손수레를 가득 채우면 120㎏쯤 된다. 손수레 무게 60㎏까지 포함해 180㎏이 되면 고물상 주인은 5천원을 건넨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2500원, 최저시급의 4분의 1 수준이다. 9시에 도착해 오후 6시에 퇴근하기까지, 박영분은 1만5천원 안팎을 번다. 이날은 전날 비가 와서 폐지가 물을 머금은 탓에 무게가 평소보다 더 나왔다. “원래 이 정도면 3천원인데, 기자들이 와서 그런가? 많이 쳐줬네.” 5천원을 손에 쥔 박영분이 횡재라도 한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박영분씨가 고물상에 폐지 120㎏을 건네고 받은 돈 5천원.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폐지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골목길에서 폐지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고물상에서 수집한 폐지의 무게를 확인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빌딩 청소에서 폐지 줍는 일로 하루 세차례씩 120㎏, 모두 360㎏의 고물을 모으려면 밥 먹을 틈은 없다. 아니, 먹으려야 돈도 없다. 강남대로에서 밥 한끼 먹으려면 120㎏을 두번은 실어야 한다. 대신 박영분은 떡이나 고구마, 밥과 김치 도시락 같은 것을 집에서 챙겨 나온다. 그나마도 챙길 것이 없는 날엔 “밥에 우유를 후루룩 말아서 먹는다”고 했다. “일하다가 정 배고프면 건빵 한봉지 사서 먹어. 난 그거면 돼.” 박영분이 배시시 웃었다. 박영분의 삶은 늘 그러했다.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때만 해도 밥은 곧잘 먹었다. 초등학교라도 잘 배워서 졸업했다면 평생 끼니 걱정 없이 살았을까. 박영분은 때때로 생각했다. 부모는 “학교가 멀다”며 박영분의 발목을 잡았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면서 넉넉한 시절이 열릴 것도 같았다. 남편은 박영분이 34살을 맞았을 때 건강이 안 좋아 세상을 먼저 떠났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올라온 뒤 박영분은 ‘점심밥’이란 걸 제때 챙겨 먹어본 기억이 없다. 식당에서 일할 땐 오후 3시가 넘어서야 허겁지겁 밥을 욱여넣었고, 빌딩 청소를 할 땐 도시락으로 틈날 때 허기를 채웠다. 그러니 이날처럼 ‘제대로 된 한끼’를 공짜로 먹은 날은 박영분에겐 ‘운수 좋은 날’이다. 논현동 뒷골목에서 20년 넘게 고물을 줍다 보니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150㎝도 안 되는 작은 키와 40㎏을 넘길 듯 말 듯 왜소한 몸, 이 동네에서 폐지 줍는 이들 가운데 유일한 ‘할머니’라는 점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박영분이 지나갈 때면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남은 음식을 내어준다. 박영분은 그중에서도 달달한 카스텔라를 좋아한다. 슈퍼에서 얻은 카스텔라는 뻑뻑해 보였지만, 이날 낮 12시30분께 길모퉁이에 상자를 놓고 앉은 박영분은 허겁지겁 빵을 삼켰다. 손이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새도 없었다. 아침 6시 집에서 첫 끼를 먹은 뒤 출근해 3시간 넘게 쉬지 않고 손수레를 끌었으니 꿀맛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노동량을 고려하면 빵과 우유가 ‘제대로 된 한끼’일 수가 없어 보였다.
박영분씨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슈퍼에서 받은 카스텔라 빵과 두유를 내어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