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20.01.04 16:11 수정 : 2020.01.17 09:53

12세기에 첫 삽을 뜬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중앙 첨탑뿐 아니라 벽체를 감싸듯 돌아가면서 설치한 버팀도리 등이 건물의 견고함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한다. 또 노트르담 대성당은 당시 퍼지기 시작한 성모(노트르담) 숭배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관 위의 왕좌에 앉은 장엄한 모습의 성모와, 성당 내부 제단 앞의 예수를 안은 성모상은 신이 된 성모의 위상을 보여준다. 파리의 뒤를 이어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 등 다른 도시에서도 노트르담 성당의 건축이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12세기에 첫삽 뜬 파리의 상징
마리아가 성모가 되는 데 견인차
이후 여러 도시 ‘노트르담’ 경쟁

혁명 땐 ‘이성의 전당’으로 탈종교
포도주 보관장소로 전락하기도
로베스피에르가 약탈 막아내
지난해 지붕 화재로 최대 위기

앞마당은 ‘요한 바오로 2세 광장’
중세·근세 건물터 바닥에 표시

12세기에 첫 삽을 뜬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중앙 첨탑뿐 아니라 벽체를 감싸듯 돌아가면서 설치한 버팀도리 등이 건물의 견고함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한다. 또 노트르담 대성당은 당시 퍼지기 시작한 성모(노트르담) 숭배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관 위의 왕좌에 앉은 장엄한 모습의 성모와, 성당 내부 제단 앞의 예수를 안은 성모상은 신이 된 성모의 위상을 보여준다. 파리의 뒤를 이어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 등 다른 도시에서도 노트르담 성당의 건축이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9년 4월15일부터 16일까지 세계인은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에 치솟는 불길을 보면서 가슴을 졸였다. 그때 우리는 돌로 지은 대성당의 지붕이 화재에 약하다는 데에 놀랐다. 2천년 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 건립한 판테온을 먼저 살펴보자. 지붕은 지름이 43미터나 되는 뚜껑인데, 바닥에서 43미터나 솟았다. 판테온 안에 지름 43미터의 원이 들어간 셈이다. 지붕을 받친 벽 두께가 7미터나 되어 돔의 가장자리를 떠받친다. 철근이 없는 시대에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은 돔에 대해 연구자들은 무게를 줄이는 비법이 숨어 있음을 밝혔다. 지붕 한가운데 뚫은 지름 9미터의 구멍은 지붕의 무게를 줄이면서 채광과 환기를 할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아래서 올려다보는 천장에는 사각형의 문양을 새겨서 멋을 내면서도 콘크리트의 무게를 줄였다. 콘크리트를 비빌 때 작은 단지를 대량으로 섞어 부피를 늘리고 무게를 줄였다고 한다. 만일 누군가 지붕에 올라가서 일부러 불을 질렀어도 판테온은 화마에 끄떡하지 않았으리라.

그보다 천년 뒤에 착공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재로 지붕이 무너졌다. 나무로 지붕을 떠받쳤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실내의 천장 높이가 33미터이며, 그 위에 동서의 가로축 길이 120미터에 너비 13미터, 남북의 세로축 길이 40미터에 최고 높이 10미터의 지붕을 얹었다. 천장 위의 공간에 21헥타르의 참나무 숲에서 1300그루를 베어서 “노트르담의 숲”을 조성했다. 이 숲이 5밀리미터의 납판 1326장, 총무게 210톤을 견디면서 8세기 동안 바싹 말랐다가 불이 붙어 지붕의 중심부에 세운 첨탑까지 무너뜨렸다. 우리는 화재로 약해진 대성당을 언제 다시 관람할 수 있을까?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지난해 4월 화재로 지붕이 전소됐으며, 중앙 첨탑도 무너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납판으로 된 지붕을 떠받치는 천장 구조물을 나무로 만들어, 화재에 취약한 구조였다. AP 연합뉴스

_____________
1804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치러

프랑스의 주요 도시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노트르담(Notre Dame) 대성당이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노트르담 대성당이 아니라 도시 이름을 붙여야 고유명사가 된다. 12세기에 파리를 시작으로, 샤르트르·랭스·스트라스부르·아미앵·보베가 차례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졌다. 중세 도시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을 때 재력이 허락하는 한 기술력을 총동원했다. 누가 천장의 높이를 더 높이는가, 내부와 외관을 더 화려하게 꾸미는가를 경쟁했다. 대성당(cathedral)은 주교의 의자(주교좌)를 갖춘 성당을 뜻한다. 주교 관구에 하나씩 있는 주교좌 성당은 주민들에게 교화사업과 구빈사업을 하는 교회를 여럿 거느린다. 그러므로 대성당은 그것을 세운 도시민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파리는 1622년부터 대주교구가 되었다. 그리고 1789년부터 노트르담 대성당은 종교와 전혀 관계없는 정치생활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주교청은 전국신분회 대표를 뽑는 선거인들의 회의장으로 쓰였고, 10월6일 파리 아낙들이 루이 16세 일가를 파리로 데려간 뒤 국회도 파리 의사당의 후보지로 고려하다가 좀 더 큰 곳을 선택했다. 1790년 초 루이 16세를 파리에서 빼돌리는 음모를 꾸민 파브라 후작은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는 길에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잠시 공개 참회를 했다. 1791년 3월에는 교회가 아니라 민간인 선거인단이 파리 대주교(고벨)를 뽑았다. 구체제에서는 주교를 교황이 임명했는데, 혁명기에는 성직자 시민헌법에서 종교인도 공무원처럼 선출직으로 바꾸었다. 1793년에 대성당은 무신론의 바람을 맞아 이성의 전당으로 개명했다. 파리 코뮌이 모든 교회를 문 닫게 했을 때, 대성당은 약탈당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약탈을 멈추게 했지만, 대성당은 포도주를 보관하는 창고 노릇을 했다. 나중에 종교적 지위를 되찾았지만, 재정적으로 피폐해졌다. 돈(아시냐)의 가치는 30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는데, 신도들은 헌금조차 외면했다. 혁명 전까지 대관식 장소는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는데, 1804년 12월2일에 나폴레옹 황제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7세를 무시한 채 스스로 관을 썼다. 가톨릭은 국교의 지위를 잃고 여러 종교와 경쟁하게 되었지만 대성당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파리를 방문하는 현대인들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도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는다.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믿던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박해를 받다가 4세기 초에 공인받고, 4세기 말에 국교가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오히려 기독교는 서양의 문명을 지배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교리도 점점 하나로 통일해나갔다. 기독교가 서양의 유일한 보편종교가 되면서 주교들의 공의회에서 인정하는 학설만을 교리라 불렀다. 원래 ‘다른 학설’을 뜻하는 말이 ‘이단’이라는 무서운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성부와 성자가 인간의 시간이 아닌 영원 속에서 같은 존재라는 교리를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같은가 의심했기 때문에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이 되었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라고 인정했지만, 마리아가 사람이며, 따라서 예수의 신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교리 논쟁에 깊이 엮이지 말고, 마리아 숭배를 가시화한 문학과 미술에서 마리아의 지위를 알아보자. 프랑스 종교사가 실비 바르네(Sylvie Barnay)는 8세기부터 마리아를 이용해서 신성한 통치권을 규정했으며, 12세기에는 문학에서 ‘성모’(Notre-Dame)로 표현하고 대성당 현관 위의 왕좌에 앉은 장엄한 모습으로 새겼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말한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광장 한쪽에는 로셰 형제가 19세기에 만든 샤를마뉴 기마상이 서 있다. 프랑스의 기원이 된 샤를마뉴의 기마상 건립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유럽에 불기 시작한 국민국가에 대한 당시 분위기와 인식을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____________
샤를마뉴 기마상과 기묘한 조화

시테섬에 우뚝 선 노트르담 대성당은 분명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다. 그 터는 종교적인 전통을 가진 곳이다.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는 시테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뱃사람들(Nautes)이 “가장 위대한 최고의 신” 유피테르에게 신전을 바쳤고, 파리 수호성인 생트 준비에브가 생존할 때인 5세기부터 생테티엔 교회가 있었다. 1163년 3월24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첫 돌을 놓기 위해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에게 바친 생테티엔 교회를 철거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은 2006년 9월부터 ‘요한 바오로 2세 광장’이 되었는데, 그곳에 도로 원표인 0㎞ 지점의 표시가 있다. 광장 바닥에는 정보가 많다. 시간에 쫓기면서 대성당 앞에 선 관광객이 시테섬을 발굴한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는 쉽겠지만, 광장에서 철거한 수많은 집의 경계를 표시한 금을 찾아내려면 조금 더 신경 써야 한다. 금을 보면서 중세와 근대까지 존재했던 건축물을 상상하면 바람이 통하지 않을 것같이 답답하다. 우리는 광장에서 대성당의 서쪽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이 “빛은 동방에서”라고 했듯이, 성당을 배치할 때 일출 방향을 고려했을 것이다. 대성당의 탑이 두 개 우뚝 서 있고, 거기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시내를 내려다보는 모습도 보인다.

필자도 달팽이 층계를 돌고 돌아 69미터의 탑 위에서 광장을 내려다본 뒤, 탑 안에 있는 거대한 종 에마뉘엘도 보았다. 13톤의 주물을 허공에 매달아놓고, 500킬로그램의 추로 소리를 낸다. 안내인은 쇠뭉치로 종의 아래를 긁어 소리를 들려주었다. 남탑과 북탑에 훨씬 작은 종도 여럿 있다. 교구 안에서 결혼식 같은 경사가 있을 때 경쾌하게 종을 쳤다. 왕세자가 태어났을 때는 종을 치고 축포도 쐈다. 게다가 파리 주민들에게 돈도 나눠주고 밤에는 불꽃놀이도 했다. 전란이 일어나거나 도적떼가 몰려올 때는 숨 넘어갈 듯이 경종(警鐘)을 울렸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전국에서 수시로 경종이 울렸다. 그러나 탈기독교 운동이 확산되면서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여느 성당처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십자가 모양이다. 세로축과 가로축이 만나는 지붕에 첨탑이 있다. 성당은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에 바치는 공물이다. 문턱을 넘어 거대한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오른편에서 샤를마뉴의 기마상을 본다. 19세기에 로셰 형제가 제작한 기마상의 뜻은 무엇일까? 프랑크 왕국의 제2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받은 기독교 세계를 구했다는 사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고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 그가 죽은 뒤 제국이 쪼개질 때 프랑스가 탄생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의 기마상을 대성당 앞 광장에 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샤를마뉴는 800년에 받은 황제의 관을 쓴 채, 778년 8월15일에 롱스보 전투에서 전사한 ‘용자’(勇者) 롤랑과 ‘현자’(賢者) 올리비에에게 말고삐를 쥐게 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세운 대성당 앞 광장에 19세기 후반에 우뚝 선 기마상을 통해서 역사적 시간이 뒤섞였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성부·성자·성신의 3위가 하나이니, 기독교 역사에서 지상의 시간을 고집하지 말자. 합리주의와 로맨티시즘의 관계 속에서 대성당과 샤를마뉴 기마상의 조화를 봐 넘기자.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여러 나라가 국민국가를 만들면서 민족의 기원과 자긍심을 찾을 때 기마상을 세웠다는 점에 주목하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남북 양쪽에 있는 지름 13미터의 ‘장미창’은 외부에서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할 뿐 아니라 가톨릭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지난해 화재 직후에 북쪽 장미창을 찍은 사진으로, 화마에도 원형을 보존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___________
예수의 외할머니까지 신성시

현대인에게 대성당 안은 어둡다. 그러나 대부분 자연광에 의존하던 중세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벽을 높이 올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일상생활의 장면을 담은 채색 유리창을 큼직하게 내서 빛을 끌어들였으니 신도들은 하느님이 성당 안에서 세상을 어루만진다고 느꼈으리라. 1250년과 10년 간격으로 설치한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지름이 13미터나 되지만 작게 보인다. 벽을 높게 쌓느라 두께를 얇게 한 대신 바깥에 버팀도리를 대서 건물의 안전성을 높인 것이 프랑스 양식의 멋이기도 하다. 대성당의 동쪽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을 잘 감상할 수 있다.

대성당을 서쪽에서 드나들 수 있는 입구는 셋이다. 오른쪽의 생트안(성 안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문이며, 왼쪽의 비에르주(la Vierge) 문은 성모를 기리는 문이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문은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쥐주망 데르니에(le Jugement Dernier)이다. 모든 성당의 문 옆과 위에는 성경의 주요 장면을 새긴다. 신도는 거기서 하느님을 믿는 삶과 말씀에서 벗어난 삶의 차이를 본다. 조각에는 순교한 성인의 모습도 포함시켜 비록 이 세상의 육신을 떠났지만 영원히 살아 있음을 신도에게 가르친다. 신도나 관광객은 문턱을 넘는 순간 속세를 벗어난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채색 유리창을 통과한 빛과 촛불의 덕택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을 본다. 중앙 제단, 양쪽에 있는 작은 기도실과 보물을 빼놓지 말고 봐야 한다. 바깥으로 나와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면 성모 마리아의 문 옆에 새긴 생드니(드니 성인)의 조각상이 인상적이다. 목이 잘린 그는 양옆에 천사를 거느린 채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받치고 서 있다. 다음에는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한때 약탈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나폴레옹 1세가 1804년 이곳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권위를 되살렸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1806년에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한겨레> 자료사진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