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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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1987년을 지나왔던 사람들은 그 자신 ‘6월 항쟁’의 승리를 이끌어 낸 주인공의 하나라고 여긴다. 항쟁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지난날의 군사독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민주항쟁의 시민인 것이다. 또 그들은 20년 전의 6월 항쟁을 역사라기보다는 여전히 진행되는 현재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그 이면에는 역사로 기록하기에는 아직 완결하지 못한 미진한 과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6월 항쟁은 역사이면서 동시에 저마다 살아있는 경험이다. 87년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와 그 이후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몇 번의 기만책이 폭로되면서 전국민의 분노가 야기되었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거대한 항쟁이 촉발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느 항쟁이든 직접적인 계기는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의 사건만으로 항쟁이 야기되지는 않는다. 안으로 수많은 문제들이 계속 누적되다가 임계상태에 이르게 되어 폭발하는 것이다. 6월 항쟁도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거슬러 반유신 운동으로부터의 대장정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민들은 행동에 나서기까지 참으로 굼뜨기 짝이 없었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모진 탄압에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 사이 위정자들은 더욱 오만에 빠져 국민을 기만하려 들었다. 문득 어느 한계를 지나면서 분노가 무서운 기세로 연쇄폭발하였다. 그렇게 전국이 투쟁의 현장이 되었고 전선이 따로 없이 대도시는 물론 시골 읍면 소재지에서도 반독재 민주화의 외침이 일었다. 계층 지역 남녀노소 누구나 항쟁에 동참하거나 동조하는 순간 투쟁의 주체가 되었다. 그렇게 독재자와 그 주위에서 음흉하게 권력을 향유해 온 반민주 세력을 향한 국민의 분노는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장강대하를 이루었다. 끝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국민은 위정자들이 진실을 기만하고 왜곡할 때 가장 강하게 분노를 느낀다. 분명한 사실을 두고 교묘한 언어로 호도하거나 뻔한 기만책을 반복하면서 국민을 훈계하려 들 때 더는 참거나 침묵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 언론까지 언제나처럼 독재자를 감싸면서 턱없는 소리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항쟁은 지난 역사의 찌꺼기들도 함께 휩쓸어 갔다. 비단 반민주적인 정치제도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남아 있던 낡은 요소들을 청산하는 계기였다. 성차별, 부당한 노동자 차별과 탄압, 반민주적 교육현장, 부정부패, 극단적인 반공냉전 체제와 대외종속 등 봉건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잔재들을 타파하기 시작하였다. 6월 항쟁을 계기로 사회 전반의 혁명적 개혁이 추동된 것이다.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일파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시위군중을 진압하려 갖은 잔꾀를 부렸다. 이미 85년부터 장기집권 획책 공작을 진행하였다. 격렬해진 학생들의 시위를 구실로 대형 공안사건을 조작하여 활용하려던 음모였다. 사건을 날조하고자 김근태씨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에게 무차별 고문을 행하다가 결국은 박종철 고문치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시대착오적 폭거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6월 항쟁의 큰 의미는 지도부를 꾸려 시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항쟁의 동력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낸 데 있다. 그동안 투쟁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운동본부라는 항쟁지도부를 꾸려 운영함으로써 큰 희생 없이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위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혁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는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초래한 실수에 대한 자책 때문이다. 6월 항쟁은 언제까지 미완의 혁명일는지 사람들의 조급한 심정을 아랑곳않고 역사는 오늘도 시행착오를 거듭해 간다.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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