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13 19:35
수정 : 2008.06.1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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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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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2008년 6월10일 세종로에서 보았다. 1987년 6월 같은 자리에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나와 있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라고 적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딸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그렇게 사랑으로 결합돼 있었다. 이것이 민주화 20년의 대한민국이구나. 후안무치한 일부 언론들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그 시간에 우리는 이토록 견고하게 민주주의를 내면화했구나. 이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구나. 2008년 대한민국은 이렇게 민주공화국이었다. 나는 거의 울 뻔했다. 그리고 김수영을 생각했고 그의 시 <사랑의 변주곡>을 생각했으며 이 글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2008년 6월10일 세종로에서는 사랑이 변주되고 있었다.
김수영은 1921년에 태어났다. 1945년에 발표한 <묘정(廟廷)의 노래>가 첫 작품이다. 이후 15년 동안 그의 시는 대개 설움이거나 울분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의 대한민국은 참혹했고 그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다. 1959년에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발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 나왔다. 김수영이 그 거리에 있었다. “4·19 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저 하늘 열릴 때>)
4·19를 계기로 그는 달라졌다. 세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4·19의 유산을 그는 ‘사랑’이라 명명하고 1968년에 작고할 때까지 그 사랑에 헌신했다. 그가 체제를 뒤엎는 정치적 혁명뿐만 아니라 삶을 바꾸는 실존적 혁명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일상과 욕망으로 하강했다. 더불어 그의 시는 미시정치학의 세계로 나아갔다. 동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그는 자생적으로 68혁명의 정신을 선취하고 있었다. 그 한 절정이 다음 시에 있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사랑의 변주곡>) 이 시는 김수영의 대표작이자 한국 현대시사의 영광이다. 아프고 아름답다. 여기에는 아들 세대가 살아갈 세계는 지금과 다르길 간절히 바라는 한 아비의 사랑이 있고, 그 가능성(“복사씨와 살구씨”)을 필사적으로 믿고 지켜내려 했던 한 지식인의 신념이 있다.
1968년에 작고한 그는 끝내 복사씨와 살구씨의 혁명을 보지 못했지만, 5·18과 6월 항쟁을 겪은 우리는 그의 예언이 실현됐음을 알고 있다. 아니, 2008년 오늘, 시청 앞의 저 촛불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변주’가 아닌가 하고 다시 한번 놀란다. 그렇게 그는 앞서 갔고 우리는 아직 그를 추월하지 못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싸우고 있다.”(<하…그림자가 없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 그는 일상과 욕망의 영역에서 적들과 싸웠고 혁명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 ‘욕망의 미시정치학’은 아직까지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를 더 읽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랑을 더 아름답게 변주해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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