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26 20:39
수정 : 2008.06.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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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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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근래 교수 출신 인사가 정부 고위직이나 대학 총장 자리에 오를 때면 종종 표절이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논문 등 지적 창작물의 구상, 문장, 연구내용 등을 인용 없이 베끼는 ‘타인 표절’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성과를 낳았다. 타인 표절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있지만, 자기 표절에 대해서는 우리 교육부나 학계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이 없다. 그런데 최근 정진곤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 내정자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앞장서 제기해온 우희종 서울대 교수가 ‘자기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우 교수 비난의 선봉에 선 손숙미 한나라당 의원의 논문은 타인 표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필자가 아는 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자기 표절 판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자기 표절은 학자가 이미 발표한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다시 게재하거나 그 논문의 일부나 전부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다른 논문에 포함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학술적 평가절차가 필수적인 학술지와 학술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신문·주간지·월간지 등 비학술단체 발간물과 학술지 사이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학술대회 발표문, 연구용역 보고서, 학위논문 등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붙지 않는 발표물을 이후에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자기 표절이 아니다. 셋째, 학술지와 학술지 사이의 경우 뒤에 발표한 글에서 이전 발표 글을 밝히고 편집위원회의 동의가 있다면 자기 표절의 혐의에서 벗어난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정진곤 내정자가 논문 일부를 시·도교육청 정기간행물에 실은 것은 자기 표절이 아니다. <교육철학> 등의 몇몇 학술지와 <열린교육>에 실린 논문 중 중복된 것이 발견되는데, 이 중 뒤에 발표된 논문이 이전 발표된 논문과의 관련성을 밝혔다면 문제의 소지가 적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표절의 소지가 크다. 반면 손숙미 의원의 1998년 <생활과학 연구논집> 발표 논문은 제자의 석사논문상의 실험대상과 결과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타인 표절의 소지가 크며, 이후 그 제자와 공저로 발표한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 발표 논문은 1998년 논문과 동일한 기초 데이터를 사용하였기에 불성실한 논문이다.
한편 우희종 교수의 경우는 자신의 단독 연구용역 보고서와 다른 교수들과 공동으로 재단에 제출한 연차보고서 사이의 중복 문제다. ‘연구용역 보고서’는 발주 단체로부터 돈을 받고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결과물로 학술논문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기초로 한 학술논문을 작성하여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 교수와 동료 교수 17명이 학술진흥재단에 제출한 ‘연차보고서’는 원래 소속 교수들이 기존에 발표한 논문이나 연구용역 보고서를 모아서 제출하는 것으로 기존 업적과 중복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손 의원 잣대대로라면 연차보고서 관여 교수 모두가 표절 교수가 될 것이다.
물론 우 교수가 연차보고서 등의 작성과 제출의 계약조건을 어겼다면 연구비 반납 등 민사상 계약 위반의 책임을 질 것이나, 표절이 문제가 되는 사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당 의원이 연차보고서 참여 교수들 중 유독 정부 정책 비판자만을 찍어서 표절 교수라고 맹공을 가하는 것은 초선 의원의 공명심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렵다. 이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학문의 자유를 억누르고 나아가 광우병 쇠고기 정국을 반전시키려는 기획의 일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교수 출신 정치인이 앞장서다니!
앞으로도 교수의 논문표절 검증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검증이 반대파에 속한 교수를 망신주고 흠집내겠다는 정파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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