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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22 18:19 수정 : 2014.09.22 18:19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문: 잠수부들은 무슨 장비를 들고 잠수하던가요?

답: 빠루(지렛대로 사용하는 쇠 작대기) 같은 거!

세월호 구조작업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 문답이 연 35조원의 방위비를 지출하면서 ‘국가안보’를 국시만큼이나 신성시하는 나라에서, 해군과 해경 인력이 총동원된 현장에서 오간 것이라고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세월호 참사는 헌법이 약속하고 있는 국민의 안전과 존엄이 국가에 의해 어떻게 취급받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 이상 세월호 참사 이전처럼 살 수 없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시민들은 이 고장 난 체제가 강요하는 대로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행동하고 있다. 사회운동은 새로운 질문에 직면해 있다. 세월호 이전과는 다른 사회를 위한, 이전과는 다른 사회운동은 어떤 것일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나타난 몇가지 단서들을 통해 이후 성찰의 단서로 삼는 것도 좋은 접근법일 듯싶다.

우선, 기억투쟁과 권력감시의 중요성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민들의 공통된 다짐은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통의 기억을 잊지 않는 것은 권력을 상대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사회운동의 사명은 시민들의 기억을 돕는 것일 터이다. 이 점에서 세월호 참사는 권력감시 사회운동의 존립 근거를 재확인해준다.

둘째, 행동하는 시민, 혹은 새로운 풀뿌리 사회조직의 출현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다짐한 시민들이 특별법 청원 500만명 서명 돌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국민대책회의의 구실은 시민들의 참여와 연대를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함께한 이들이 과연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만나고 확인하고 연결해 나가는 것은 사회운동의 큰 숙제다.

셋째, 당사자와 현장의 재발견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은 피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자각에 따라 스스로를 대책기구로 조직한 후, 함께할 사회운동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과정을 밟았다. 팽목항에서 가족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활동가들이 그 매개자가 되었다. 사회단체들이 앞장서기보다 가족들을 충실히 지원하는 현재의 국민대책회의 구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당사자가 주도하는 연대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넷째, 진영논리의 폐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조차 진영 대결의 구도에 포박되고 있다. 대결의 평행선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편가르기, 공존을 거부하는 적대와 혐오, 공론 형성을 방해하는 정보와 매체의 독점을 넘어서지 않고는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사회운동은 소통과 공감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

다섯째, 공동체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세계 보수의 종갓집으로 불리던 로마 교황청의 새로운 수장이 ‘무한경쟁의 사조와 맞서 싸우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격하라’고 호소했다. 승자 아니면 패자로 나뉘는 이기심과 경쟁의 질서 대신 시민사회의 공감과 연대에 바탕을 둔 사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올해로 창립 20돌을 맞은 참여연대에도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참여연대의 미래 비전도 세월호 이후의 사회와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찾아질 터이다. 행동하는 시민의 동반자이자 연대의 가교로서 제구실을 다하려면 몸을 낮추어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야 한다.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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