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28 20:15
수정 : 2016.03.28 20:52
삶과 이야기가 담긴 건축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 업인 나에게 책은 각별하다. 이 땅의 모든 역사를 품고 있어 저마다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책에 대한 관심으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전이 열리는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자그마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살았던 음악의 도시이자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된 월요기도회가 시작된 니콜라이교회가 있는 건축과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독일의 문화와 지식이 망라되는 도서박람회가 1632년 독일 최초로 시작된 유서 깊은 출판문화의 도시라는 것이다.
건축과 새내기들은 건축학개론 시간에 흔히 세계 최초의 건축 책인 <건축십서>를 접하게 된다. 이 책은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저술로 전해지는, 건축에 관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로마 건축의 역사·미학·공학이 망라된,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 건축서적으로, 오늘날의 서양건축은 이 책이 있었기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책은 한 문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도서전은 매년 3월 열려 세계에서 16만명 이상이 참여하며 각종 신간과 고서가 전시되는, 책을 매개로 한 라이프치히시 전체의 문화축제다. 이 기간 동안 도시는 그윽한 책의 향기로 넘쳐난다. 출판인들만을 위한 여느 도서전과는 달리, 저자와 독자가 다양한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만남의 장이자, 지적 담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문화교류의 장이다. 이번에도 러시아의 야당 지도자로 지난해 암살된 넴초프의 1주기를 맞아 그의 딸이 초대되어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이 도서전을 자국의 문화적 역량과 수준을 보여주기 위한 장으로 국가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수많은 전시 부스 중에 한국관도 있었다. 한국관 운영은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가 주축이 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가운데, 협회 관계자와 현지 유학생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올해의 주제인 ‘한국 전통건축’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주제 도서인 <한옥>을 비롯한 현대 도서들과, 조선 영조 때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데 소요된 모든 것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 전통건축 관계 고문헌 영인본들이 전시되었다. 부스 한편에서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양동마을 등에 관한 영상물도 상영되었다. 당초 잠깐 들를 요량이었으나, 전시부스에 발을 들여놓자 이러한 문헌들은 나를 전체 일정인 엿새 동안 함께하도록 강하게 붙잡았다.
6박7일 동안 행사를 참관하면서 한국 문화의 세계적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일본은 한 전시관 전체를 ‘망가’를 중심으로 한 일본 문화로 점령하고 있었고, 독일의 젊은이들은 망가에 나오는 복장으로 코스프레를 하며 전시장을 메웠다. 그러나 한국관은, 그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규모 면에서 일본과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로지 책과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라이프치히를 거점 삼아 한국 문화를 알리고자 애써온 이기웅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장의 뜻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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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구 청운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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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가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무역량이나 국민소득 등 경제력 못지않게 문화가 단단히 구축되어야 한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는 말처럼, 문화는 끊임없이 기록되어야 한다. 기록은 곧 책이며, 책을 통해 우리의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공유된다. 그 기록은 나의 기록이고 나의 역사이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대여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한종구 청운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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