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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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초유의 헌정문란 사태 - 뭣이 중한가?/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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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3 17:24
수정 : 2016.11.14 09:47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변호사
충(
忠)
이 무슨 뜻일까?
상관을 위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흔히 오해하지만 <강희자전>은 진심을 다하고 속임이 없는 것(
內盡其心, 而不欺也),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는 것이 충(
無私, 忠也)
이라고 설명한다.
대통령이 자기 친구의 끝모를 사적 욕심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여러 ‘사업’ 추진을 위하여 비서진과 장차관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재벌 총수를 한명씩 불러놓고 돈을 내라고 압박했다는 사정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불충의 가장 적나라한 경지를 목격하고 있다.
대통령의 불충과 국헌문란이 이런 지경에 이르면 그 나라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고 그런 대통령은 더 이상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지도자가 떳떳하고 올곧아야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점은 굳이 고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아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이른바 ‘대포폰’으로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작업’을 해왔다는 점 한가지만 보더라도 그런 정권은 이미 자신이 범죄집단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진작에 자인하고 있었음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침몰한 배 안에 어린 학생 수백명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갇혀 있는 동안 대통령은 7
시간이나 잠적해 놓고 아직도 해명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나라가 아니다.
대통령의 ‘친구’라는 최씨 일당이 건드리고 지나간 곳은 망가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최씨의 딸이 입학했다는 이화여대,
최씨와 연줄이 닿은 의사를 병원장으로 받들고 있는 서울대 의대는 대학교수들의 비굴함과 비루함을 말해준다.
대기업들은 뇌물인지 ‘보험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돈을 내고 이권을 거래해왔고,
정부는 문화 진흥이라는 핑계로 수천억 예산을 최씨 일당의 주머니로 몰아주면서 정작 예술인에 대하여는 이른바 ‘블랙리스트’라는 것으로 예술의 생명인 비판정신을 말살하려 획책해왔다.
그뿐인가?
평창올림픽을 빌미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가꾸고 누려야 할 산하를 마구잡이로 훼손하면서 토건판을 벌여 사욕을 채우려 시도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등 국가안보에 직결된 여러 정책 결정 과정까지도 국익이 아니라 사익을 위하여 좌지우지되었다는 의혹마저 제기된 마당이다.
지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이런 대통령이 국정과 외교안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정책 결정 프로세스의 사유화를 중단하고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지,
국무총리의 헌법적 권한과 한계에 대한 갑설을설을 내놓고 한가로이 논박할 때가 아니다.
대통령이 불쑥 국회에 와서 헌법에 이미 적혀 있는 대로 총리가 “행정 각부를 통할”하도록 하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간 것은,
헌법 조항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이슈를 교란해보겠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여당 야당을 가릴 상황이 아니고,
보수 진보를 나눌 계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불충이 극에 달한 대통령의 헌정문란으로 촉발된 민심의 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손익계산의 주판을 놓으며 이른바 ‘책임총리’의 의미와 한계가 무엇인지, ‘
권한대행 총리 체제’가 개시될 요건이 충족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꺼냄으로써 관심의 초점을 지엽말단적 사안으로 끌고가는 무능함과 아둔함은 거두어야 한다. “
대통령은 물러나라”는 국민의 도도한 요구를 충실히 관철하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대통령 퇴진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먼저 관철되고 나면,
그 합의를 헌법적으로 무리 없이 실행할 구체적 방안을 고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법률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법률가가 필요한 때가 아니라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대통령이 스스로 퇴진하지 않을 것이므로 퇴진 요구는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을 펴는 자들도 있다.
자신의 윤리적 게으름을 마치 노회한 전략적 사고인 양 포장하여 스스로를 위안하며 아예 노력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포기하는 이러한 자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역사는 이러한 자들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져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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