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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6 17:58 수정 : 2017.03.26 19:00

정대현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를 받아들여 2017년 3월10일 대통령을 재판관 전원일치로 파면하였다. 1987년 민주화의 결과로 그 이듬해 탄생한 헌재가 2017년에 대통령 직무를 명료화한 것이다. 권력으로 기업을 강제해 모금했던 유신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통령을 해임한 것이다. 헌재는 헌법수호, 법치주의, 국권재민의 원리를 확인해준 것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직 수행의 성실성에 대한 헌재의 해석은 토론을 필요로 한다. 헌재는 선고에서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는지 여부는 탄핵심판 절차의 판단 대상이 안 된다”고 밝혔다. 헌재는 그 근거로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다”라는 성실의 개념 분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헌재의 성실 개념 분석은 의문스럽다. 성실은 구타나 악수 같은 발생적 성질이 아니라 친절이나 사랑같이 성향적 개념이다. 잠자는 사람이 악수할 수 없지만 친절할 수 있는 것처럼, 일상적 개인은 성실을 성향적 성질로 가질 수 있다. 또한 성실은 친절이나 사랑처럼 0~1의 좌표대에서 “더” 또는 “덜”의 보조어로 수식되는 정도의 개념이다. 그래서 헌재는 성실의 이러한 정도성 속성에 주목하여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분석했을 것이다.

문제는 성실이 친절과 같은 정도성의 범주이지만 두 개념은 인간 사회질서에서 달리 작동한다는 점이다. 성실과 친절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보자. 김철수씨가 임신부를 보고 지하철 좌석을 양보함으로써 자신의 친절이라는 성향적 성질을 발생적 성질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정미 전 헌재 재판관은 출근하면서 헤어롤을 푸는 것을 잊음으로써 성실이라는 성향적 성질을 발생적 성질로 드러내었다.

성실이나 친절은 개인의 심성적 상태를 보여주는 동등한 성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개념의 차이는 현저하다. 친절의 유무는 김씨 행위의 부사적 성질이지만 성실의 유무는 이 전 재판관의 역할의 원초적 성질이다. 친절은 김씨의 성품을 더 온전하게 하는 윤리적 성질이지만 성실은 이 전 재판관의 임무를 구성하는 본질적 성질이다.

이러한 대조는 성실에 대한 동양 전통의 오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불성무물(不誠無物),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도 없다”라는 명제는 성실이 원초적 가치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마치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상처를 입은 이웃을 향하여 측은한 마음이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측은지심을 원초적 가치로 내세우는 논리와 동일하다. 성실이나 측은은 친절과 같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성실이나 측은은 인간사회의 본질적 가치인 것이다.

헌재가 대통령직 수행의 성실성을 추상적으로 해석하여 분석하는 데 있어서 오류는 상상할 만하다. 그 잘못은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헌법 69조의 “성실히”를 직책 수행의 부사적 양상으로 해석한 데서 결과된 것이다. 그러나 “성실히”는 직책 수행의 본질적 양상으로 해석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성실히”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역할에 전제되어야 할 성심(誠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동양사상이 그렇게 오래 강조해온 성실을 원초적 가치로 지켜온 전통과 일관된 것이다. “성실히”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부사적이고 상대적인 양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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