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보수와 진보. 최근 신문과 방송에 부쩍 등장하는 말이다. 반가운 일이다. 진보와 보수가 공론장에서 소통할수록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다. 서유럽과 견주면 한국 민주주의의 법제 수준은 남세스러워 더 그렇다. 보수와 진보의 토론이 활발하고 그것을 공영방송이 담아가야 옳다. 하지만 작금의 논쟁은 전혀 건강하지 않다. 보수나 진보라는 말부터 부적절하다. 어떤 말로 정치 현실을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밑절미다. 찬찬히 짚어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하자 모든 언론이 ‘진보성향’을 지적했다. <조선일보>와 <한국방송>(KBS)은 표제마저 “대법원장 후보에 진보성향 김명수”로 똑같다. 성격이 어금버금한 언론들을 굳이 나열할 지면은 없다. 다만, <한겨레> <경향신문> <제이티비시>(JTBC)까지 무람없이 ‘진보’를 표제로 구성해 유감이다. “13기수 낮춘 ‘진보성향’ 대법원장 지명”, “진보 사법수장 인사 문제 정치권 ‘핫코너’로 급부상”, “새 대법원장 후보자에 ‘진보법관’ 김명수 지명”이 그것이다. 어떤가. 김 후보가 ‘진보성향’으로 불린 대표적 판결을 톺아보자. 먼저 삼성이 노동조합을 조직한 노조 간부를 해고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는 판결이다. 에두르지 않고 묻겠다. 그것이 ‘진보 판결’인가? 상식이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다른 하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효력을 정지한 결정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합법이던 전교조를 박근혜가 법외노조로 만든 것은 민주주의 후퇴의 문제이지 보수·진보의 시금석이 아니다. 김명수 지명은 ‘사법개혁의 출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보성향’이어서가 아니다. 딱히 성향을 보도한다면 ‘양심적’이라는 말이 적실하지 않을까. 삼성과 박근혜의 권력에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진보성향’이라는 첫 보도의 점화 효과는 후속 보도로 이어졌다.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내놓고 보수 대 진보라는 진영논리를 들이대고 언론이 이를 다시 중계해 ‘허수아비 갈등’을 키워갔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님에도 ‘이념 대결’로 설정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집권당의 고위책임자 입에서도 “대법원 구성은 진보와 보수를 골고루 아울러 국민의 평균적 생각이 반영돼야 한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이념 대결이라는 잘못된 틀에 휘말린 꼴이다. 대법원은 정권이 입맛에 따라 진보와 보수 법관으로 구성하는 대상이 아니다. 국제적인 사법 기준에 걸맞은 양식을 갖춘 양심적인 법관들로 구성해야 옳다. 만일 <한겨레> <경향신문> <제이티비시>가 모든 사안을 보수-진보의 틀로 본다고 주장한다면 균형 잃은 비판일 터다. 특히 <한겨레>와 <경향>은 ‘보수’의 문제점을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하지만 ‘보수야당·보수단체·보수언론’이라 쓰지 않아야 마땅한 대목에서 종종 그렇게 기사화하고 논평한다. 가령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얼버무리는 따위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하는 정당과 단체, 언론에 ‘보수’라는 말은 가당찮다. 기사에 그냥 그 정당, 단체, 언론사 이름을 쓰면 될 일이다. 보수·진보의 잘못된 틀로 보도하는 공영방송 문제는 무장 심각하다. 방송개혁을 열망하는 현장 언론인과 시청자들 앞에서 공영방송을 망가트린 자들이 성찰할 섟에 진영논리로 언죽번죽 맞서고 있다. 명토 박아 둔다. 2017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사법개혁과 방송개혁은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기본 또는 상식의 문제다.
칼럼 |
[시론] 보수·진보 진영논리의 함정 / 손석춘 |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보수와 진보. 최근 신문과 방송에 부쩍 등장하는 말이다. 반가운 일이다. 진보와 보수가 공론장에서 소통할수록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다. 서유럽과 견주면 한국 민주주의의 법제 수준은 남세스러워 더 그렇다. 보수와 진보의 토론이 활발하고 그것을 공영방송이 담아가야 옳다. 하지만 작금의 논쟁은 전혀 건강하지 않다. 보수나 진보라는 말부터 부적절하다. 어떤 말로 정치 현실을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밑절미다. 찬찬히 짚어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하자 모든 언론이 ‘진보성향’을 지적했다. <조선일보>와 <한국방송>(KBS)은 표제마저 “대법원장 후보에 진보성향 김명수”로 똑같다. 성격이 어금버금한 언론들을 굳이 나열할 지면은 없다. 다만, <한겨레> <경향신문> <제이티비시>(JTBC)까지 무람없이 ‘진보’를 표제로 구성해 유감이다. “13기수 낮춘 ‘진보성향’ 대법원장 지명”, “진보 사법수장 인사 문제 정치권 ‘핫코너’로 급부상”, “새 대법원장 후보자에 ‘진보법관’ 김명수 지명”이 그것이다. 어떤가. 김 후보가 ‘진보성향’으로 불린 대표적 판결을 톺아보자. 먼저 삼성이 노동조합을 조직한 노조 간부를 해고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는 판결이다. 에두르지 않고 묻겠다. 그것이 ‘진보 판결’인가? 상식이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다른 하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효력을 정지한 결정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합법이던 전교조를 박근혜가 법외노조로 만든 것은 민주주의 후퇴의 문제이지 보수·진보의 시금석이 아니다. 김명수 지명은 ‘사법개혁의 출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보성향’이어서가 아니다. 딱히 성향을 보도한다면 ‘양심적’이라는 말이 적실하지 않을까. 삼성과 박근혜의 권력에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진보성향’이라는 첫 보도의 점화 효과는 후속 보도로 이어졌다.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내놓고 보수 대 진보라는 진영논리를 들이대고 언론이 이를 다시 중계해 ‘허수아비 갈등’을 키워갔다.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님에도 ‘이념 대결’로 설정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집권당의 고위책임자 입에서도 “대법원 구성은 진보와 보수를 골고루 아울러 국민의 평균적 생각이 반영돼야 한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이념 대결이라는 잘못된 틀에 휘말린 꼴이다. 대법원은 정권이 입맛에 따라 진보와 보수 법관으로 구성하는 대상이 아니다. 국제적인 사법 기준에 걸맞은 양식을 갖춘 양심적인 법관들로 구성해야 옳다. 만일 <한겨레> <경향신문> <제이티비시>가 모든 사안을 보수-진보의 틀로 본다고 주장한다면 균형 잃은 비판일 터다. 특히 <한겨레>와 <경향>은 ‘보수’의 문제점을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하지만 ‘보수야당·보수단체·보수언론’이라 쓰지 않아야 마땅한 대목에서 종종 그렇게 기사화하고 논평한다. 가령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얼버무리는 따위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하는 정당과 단체, 언론에 ‘보수’라는 말은 가당찮다. 기사에 그냥 그 정당, 단체, 언론사 이름을 쓰면 될 일이다. 보수·진보의 잘못된 틀로 보도하는 공영방송 문제는 무장 심각하다. 방송개혁을 열망하는 현장 언론인과 시청자들 앞에서 공영방송을 망가트린 자들이 성찰할 섟에 진영논리로 언죽번죽 맞서고 있다. 명토 박아 둔다. 2017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사법개혁과 방송개혁은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기본 또는 상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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