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정역원 교무 황량한 들판에 피어 있던 또 하나의 들꽃 한 송이가 스스로 져서 저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갔다. 지난 9월19일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며 분신한 조영삼씨가 20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열사다. 권력이나 이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 땅의 정의와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이다. 그는 소박하고, 연민의 정이 두터웠으며, 온몸으로 대의를 추구하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열사가 끊임없이 나와야 하는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으므로 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삶이 그랬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중 가운데에는 조영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다. 그의 유언은 뜨거운 사랑과 자비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무조건적으로 돌본 것은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 또한 보편적 정의와 인도주의적 차원이라고 했다. 그 마음이야말로 종교에서 가르치는 약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한 민족의 슬픔마저 스스로 덥석 껴안았다. 그 아픔에 겨워 이인모씨의 초청으로 북한까지 갔다가 결국 18년간의 망명객이 되었으며, 마침내 국가보안법의 죄목으로 죄수가 되었다. 그는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아픈 곳, 성주의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 사드는 이미 법과 도덕, 정치와 경제적 유죄를 받았다. 앞의 정부나 지금의 정부나 현지 주민과 진정성 있는 대화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사드가 한반도 전쟁 억지용이 아니라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으로 한·미·일이 북·중·러를 포위하는 미국의 패권정책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사시 성주는 제일 첫번째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명명백백한 사실을 정부는 숨긴다. 그 뒤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있다. 북한의 도발을 틈타 여지없이 무기를 판매하는 수법을 목격하고도 우리는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쓰고도 자주국방을 갖추지 못했다. 진정 그 많은 국민의 혈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전히 이른바 주류 언론은 이러한 수십년간의 적폐 사실을 심층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개혁을 외친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언론개혁인가. 여전히 모든 진실은 안보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잘되길 바랐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촛불의 열망이 꺼지지 않도록 시민으로서 사랑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사이 문 대통령에게 던진 한 표를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다. 앞의 정부와 변별력이 떨어져 가는 현실에 불안만 엄습해 온다. 현 정부의 정치적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든다. 그가 사드에 반대한 이유는 한반도가 또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될까 두려워해서다. 그는 문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나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드 철회를 위한 협상에서 자신의 희생이 한 방울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애절한 그의 호소가 위정자들에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땅의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가 좋아하던 예수님 아니면 하나님을 모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칼럼 |
[시론] 우린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나- 조영삼 선생을 기리며 / 원익선 |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교무 황량한 들판에 피어 있던 또 하나의 들꽃 한 송이가 스스로 져서 저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갔다. 지난 9월19일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며 분신한 조영삼씨가 20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열사다. 권력이나 이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 땅의 정의와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이다. 그는 소박하고, 연민의 정이 두터웠으며, 온몸으로 대의를 추구하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열사가 끊임없이 나와야 하는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으므로 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삶이 그랬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중 가운데에는 조영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다. 그의 유언은 뜨거운 사랑과 자비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무조건적으로 돌본 것은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 또한 보편적 정의와 인도주의적 차원이라고 했다. 그 마음이야말로 종교에서 가르치는 약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한 민족의 슬픔마저 스스로 덥석 껴안았다. 그 아픔에 겨워 이인모씨의 초청으로 북한까지 갔다가 결국 18년간의 망명객이 되었으며, 마침내 국가보안법의 죄목으로 죄수가 되었다. 그는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아픈 곳, 성주의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 사드는 이미 법과 도덕, 정치와 경제적 유죄를 받았다. 앞의 정부나 지금의 정부나 현지 주민과 진정성 있는 대화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사드가 한반도 전쟁 억지용이 아니라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으로 한·미·일이 북·중·러를 포위하는 미국의 패권정책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사시 성주는 제일 첫번째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명명백백한 사실을 정부는 숨긴다. 그 뒤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있다. 북한의 도발을 틈타 여지없이 무기를 판매하는 수법을 목격하고도 우리는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쓰고도 자주국방을 갖추지 못했다. 진정 그 많은 국민의 혈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전히 이른바 주류 언론은 이러한 수십년간의 적폐 사실을 심층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개혁을 외친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언론개혁인가. 여전히 모든 진실은 안보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잘되길 바랐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촛불의 열망이 꺼지지 않도록 시민으로서 사랑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사이 문 대통령에게 던진 한 표를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다. 앞의 정부와 변별력이 떨어져 가는 현실에 불안만 엄습해 온다. 현 정부의 정치적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든다. 그가 사드에 반대한 이유는 한반도가 또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될까 두려워해서다. 그는 문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나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드 철회를 위한 협상에서 자신의 희생이 한 방울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애절한 그의 호소가 위정자들에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땅의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가 좋아하던 예수님 아니면 하나님을 모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원광대 정역원 교무 황량한 들판에 피어 있던 또 하나의 들꽃 한 송이가 스스로 져서 저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갔다. 지난 9월19일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며 분신한 조영삼씨가 20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열사다. 권력이나 이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 땅의 정의와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이다. 그는 소박하고, 연민의 정이 두터웠으며, 온몸으로 대의를 추구하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열사가 끊임없이 나와야 하는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으므로 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삶이 그랬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중 가운데에는 조영삼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다. 그의 유언은 뜨거운 사랑과 자비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무조건적으로 돌본 것은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 또한 보편적 정의와 인도주의적 차원이라고 했다. 그 마음이야말로 종교에서 가르치는 약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한 민족의 슬픔마저 스스로 덥석 껴안았다. 그 아픔에 겨워 이인모씨의 초청으로 북한까지 갔다가 결국 18년간의 망명객이 되었으며, 마침내 국가보안법의 죄목으로 죄수가 되었다. 그는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아픈 곳, 성주의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 사드는 이미 법과 도덕, 정치와 경제적 유죄를 받았다. 앞의 정부나 지금의 정부나 현지 주민과 진정성 있는 대화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사드가 한반도 전쟁 억지용이 아니라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으로 한·미·일이 북·중·러를 포위하는 미국의 패권정책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사시 성주는 제일 첫번째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명명백백한 사실을 정부는 숨긴다. 그 뒤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있다. 북한의 도발을 틈타 여지없이 무기를 판매하는 수법을 목격하고도 우리는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쓰고도 자주국방을 갖추지 못했다. 진정 그 많은 국민의 혈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전히 이른바 주류 언론은 이러한 수십년간의 적폐 사실을 심층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개혁을 외친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언론개혁인가. 여전히 모든 진실은 안보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잘되길 바랐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촛불의 열망이 꺼지지 않도록 시민으로서 사랑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사이 문 대통령에게 던진 한 표를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다. 앞의 정부와 변별력이 떨어져 가는 현실에 불안만 엄습해 온다. 현 정부의 정치적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든다. 그가 사드에 반대한 이유는 한반도가 또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될까 두려워해서다. 그는 문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나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드 철회를 위한 협상에서 자신의 희생이 한 방울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애절한 그의 호소가 위정자들에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땅의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가 좋아하던 예수님 아니면 하나님을 모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