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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4 18:02 수정 : 2018.02.04 18:59

안문석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조지타운대 객원교수

석달 전쯤 빅터 차와 자리를 함께할 일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대의 작은 회의실에서 객원교수 몇명과 함께였다. 대북강경파로 알려져 있지만 말투, 태도는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상태였던 만큼 화제는 한반도 문제였다. “한국에 가면 뭘 하고 싶은가” 물었다. 준비했다는 듯 그의 답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쟁을 막는(prevent war)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자신의 협상 경험까지 담아서 길게 얘기했다. 지금의 북한 핵 문제는 2007년 10·3합의 이후 북한이 검증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했다. 북한의 협상 태도에도 부정적이었다. 탁자 위 자신의 물컵을 왼손에 쥐고, 마주 보고 있던 필자의 물컵을 오른손으로 가져가면서, 북한은 이렇게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식으로 협상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의 근본 원인도 북한, 협상 부재의 원인도 북한, 협상 결렬의 원인도 북한이라는 미 공화당 인식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다. 비판의 여지가 큰 것이다. 이행되어 가던 10·3합의가 물거품이 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 미국은 북핵 검증 방법으로 문서 검토와 관련자 인터뷰 외에 시료 채취를 강력히 주장해 북한의 반발을 샀다. 미국이 설정한 높은 문턱은 북한이 협상장으로 가는 길에 번번이 장애가 되었다. 협상 결렬은 미국의 요구가 북한 못지않게 강한 경우였다.

빅터 차가 협상과 관여(engagement)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해온 관여는 ‘매파 관여’(hawk engagement)이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차단한 다음 대화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강력한 제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 미국대사가 못 된 것이 빅터 차의 이런 ‘물렁한’ 주장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놀라울 뿐이다. 미국 정부에서 아니라고 부인하고, 한-미 정상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좋은 일’이라고 했지만, 여운이 가시지는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석달 전 빅터 차가 말했던, 전쟁을 막고 싶다는 얘기가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웃으면서 이 얘기를 했다. 농담으로 들어달라는 의미였다. 당시 그는 백악관에 면접을 보러 다닌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코피 전략’(bloody nose strike, 제한적 선제타격)도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개념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고, 전쟁을 막고 싶다는 얘기를 선뜻, 농담 속 진담으로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앞으로는 빅터 차를 온건파로 불러야 할 것 같다. ‘북한에 대해 강력제재를 주장하는 온건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벌써 공은 문재인 정부에 넘어와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육식 근성을 완화할 책임이 문재인 정부에 주어진 것이다. 매파 관여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파 봉쇄’(hawk containment)를 지향하는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협의규범을 만들어 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은 그것뿐이다. 트랙1.5든 트랙2든 가용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미국 정부의 북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진력해야 할 시점이다. 그나저나 빅터 차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온건파가 된 기분이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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