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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5 18:06 수정 : 2018.02.05 18:55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지금도 복지라 하면 그저 불쌍한 사람에게 뭔가 나눠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다. 이를 시혜적 복지라 하는데 이는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기실 그 뒤에 시혜하는 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권위적 태도를 깔고 있다. 이 권위적 태도는 언제라도 전면에 나와 시혜받는 자에게 복종과 감사함의 표현을 강요할 수 있다. 시혜적 복지는 통제와 억압의 복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되면 시혜받는 자에 대한 폭력과 강압이 될 수 있다.

통제와 억압은 복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지난날 우리 사회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한 엄청난 폭력을 국가의 비호 아래 자행했다.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부랑인 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은 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를 근거로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연 3천~4천명을 단속·수용하였다. 껌팔이나 구두닦이를 해서라도 살아보려던 가난한 사람들을 ‘부랑인’으로 낙인찍어 가둔 것이다. 1981년에는 전두환의 지시로 사회 정화란 미명하에 사람들을 마구 잡아 가두었다. 군대처럼 소대·중대로 편성·운영된 형제복지원은 강제노역과 폭력·성폭력, 과다 약물 투여 등이 일상적으로 존재한 ‘지옥’ 그 자체였다. 반면 원장 박인근은 국고를 착복하여 부를 축적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드러난 것은 민주화 함성이 드높아가던 1987년이었다. 당시 민주화 투쟁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다 함께 나섰다. 그것은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민주화 함성이 일던 그때, 같은 하늘 아래 살던 우리 동료들이 복지의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극을 겪은 것이다. 그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당시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것만 513명에 달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 수사는 ‘윗선’의 지시로 중단되었고 재판도 왜곡되었다.

결국 유력한 인권유린 범죄자요 살인 용의자인 박인근은 터무니없이 가벼운 혐의로 2년6개월 형만 받았고, 출소 후에는 사회복지법인의 이름만 바꿔 2016년 사망 시까지 ‘복지사업’을 계속했다.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의 1인 시위로부터 다시 본격화했다. 그 전까지 피해자들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고 목소리가 있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있었지만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복지를 앞세워 폭력을 휘두른 국가의 잘못이다. 이런 국가의 잘못을 규명하고 바로잡기 위해 특별법 발의 등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지난 정부와 당시의 여당은 문제 해결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1987년으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2017년에 우리는 또다시 인간다운 사회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이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인간다운 사회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 통제와 억압의 복지로부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형제복지원뿐이겠는가? 아직도 시혜적 복지가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제2, 제3의 형제복지원이 없을 리 없다. 복지에도 피해의 미투 운동이 필요하다.

시혜적 복지, 통제와 억압의 복지라는 적폐를 청산하고 권리적 복지를 확립해야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에 소극적인 일부 정치세력은 그들이 과거 이 사건의 축소·은폐에 가담했던 자들과 한통속임을 보여준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이번 임시국회에 특별법 제정이든 과거사 기본법 제정이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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