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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6 18:20 수정 : 2018.04.06 19:26

한선남
평화바람

제주의 봄 하면 유채꽃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강정에 살며 본 제주의 봄은 단연 벚꽃과 애기동백꽃이다. 봄이 오면 마을 안길에 줄지어 심어진 벚나무의 꽃들이 만개하고, 단정한 돌담 사이로 붉게 피어난 애기동백꽃은 마지막 찬 바람을 맞으며 피고 진다. 꽃들이 우르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다도 따뜻해지고 한라산에도 꽃이 피기 시작해 제주에는 완연한 봄이 온다.

강정에 살면서도 벚나무가 있다는 것을 몇년은 알지 못했었다. 2012년 구럼비 바위가 부서지고 길바닥 흙먼지 속에 해군기지 공사를 저지했던 그 봄날의 기억에 꽃의 향연은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땅만 바라보며 몇해를 보내고 나서야 우리 마을에 아름드리 벚나무가 있고 소담하게 피어나는 애기동백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꽃들이 피고 질 때면 어김없이 기억나는 서글픈 마음이 있다.

매일 긴급 상황을 알리며 요란하게 울리던 마을의 사이렌 소리와 해군기지 공사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부둥켜안았던 기억. 4월16일 세월호가 가라앉던 그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서 말문이 막혀 서 있던 기억. 살아서는 연필 한번 쥐어보지 못한 채 죽어야 했던 어린 조상들의 영을 달래던 심방의 넋두리를 몇 시간씩 듣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4·3의 이야기. 애기동백꽃이 한 송이씩 통째로 푹푹 떨어질 때, 잔인한 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까마귀도 모르는 식게(제사)’라는 말이 있다. 숨어서 몰래 드리던 제사를 뜻하는 제주말이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4·3 학살은 죽음을 애도할 수도 없었던 침묵과 금기의 역사를 의미한다. 해방을 맞이하며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소망이 국가권력의 폭력 속에 잔인하게 짓밟혔다. 그리고 국가는 죽음을 애도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4·3 70년은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진실을 찾기 위해 버텨냈던 지난한 투쟁이다. 죽었으되 이유를 몰랐고 죽어서 이유가 없어져 버린 조상들의 죽음은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외쳐지고 있다.

제주는 4·3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평화의 섬’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을 간직해왔다. 하지만 국가는 마을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해군기지를 완공했다. 2012년 봄 만개한 벚꽃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온 육지 경찰들의 모습이 4·3의 그날과 똑같다며 몸서리를 치며 울부짖던 마을 어른들의 쉰 목소리가 쟁쟁하다.

결국 국가 공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해군기지가 완공된 후 많은 사람들은 ‘이제 다 끝났는데 더 무엇을 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강정 해군기지는 미군이 드나들고 핵잠수함이 들어오며 10년 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공군기지가 건설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는 성산 제2공항의 문제는 강정과 똑 닮은꼴이다. 70년 전의 국가 폭력이 강정에서 되풀이되고, 강정의 역사가 또 성산에서 되풀이되려 한다. 그래서인지 4·3을 기억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오늘, 여전히 한쪽 마음은 서글프기만 하다.

4·3의 학살이 강정마을에 불어왔을 때, 바위틈에 숨어 용천수를 마시고 소라를 캐 먹으며 버텼던 생명의 터전 구럼비에는 이제 전쟁을 준비하는 군함의 뱃고동 소리만이 요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에는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평화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잊지 않는 한 끝난 것은 아니라고 조그만 깃발들은 말한다. 돌아오는 4월29일,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은 4천일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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