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0 16:58
수정 : 2019.06.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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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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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국가범죄의 대명사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독일 땅이 아니다. 베를린에서 550㎞ 떨어진 폴란드 동남부에 있다. 2차대전 직후 독일 국민은 ‘침묵의 합의’ 속에서 이곳을 외면했다. 그 합의의 장벽에 도전한 사람이 독일의 지성 아도르노다.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말로 국민을 질타하며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1957) 필요성을 역설했다.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아우슈비츠는 독일인에게 새 출발의 기준점이 됐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장소가 있을까? 독재의 길과 민주의 길이 교차했던 곳, 그 충돌 속에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개인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파괴된 장소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유혈진압된 지 7년 후 이곳에서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피해자는 박종철만이 아니었다. 남영동 외에도 전국의 여러 시설에서 개인들의 권리가 무참히 유린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수많은 국가폭력 실행기관의 집합단수명사일 뿐이다. 수도 한복판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남영동은 우리 시대 경고의 기념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이곳을 모른체했다.
그 침묵의 공조는 마침내 끝났다. 옛 대공분실은 지난해 말 경찰의 손을 떠나 국민적 기억의 터로 바뀔 준비에 돌입했고, 바로 어제(10일) 그 자리에서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렸다. 만시지탄의 감격이 현장을 지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기념행사에서 “김근태 의장이 고문당하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이곳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결정은 대통령이 밝힌 대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에 힘입어 조성된 사회적 여론” 때문에 가능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동시에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어가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망각의 벽을 무너뜨린 기억의 정치가 천년의 기억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째, 주변의 역사적 상징자산들과 적극 연계해야 한다. 민족의 시련과 극복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효창공원과 백범기념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국민의 품에 곧 돌아올 용산 미군기지 일대도 큰 기회다. 전쟁기념관을 평화의 박물관으로 바꾸고, 80만평이 넘는 반환부지를 생태평화공원으로 만드는 큰 그림이 필요하다. 이 경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민족-민주-인권-생태-평화의 메가클러스터가 서울 한복판에 조성된다. 여기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족의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이어주는 핵심 고리다. 이 역사-평화의 가로축이 북악에서 남산과 용산공원을 지나 한강 건너 동작동 현충원까지 이어지는 생태-역사의 세로축과 만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둘째, 관성적 기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권파괴와 민주승리 경험에 대한 기억은 새로 조성될 기념관의 존재 근거다. 그러나 충실한 복원과 과거 재현만이 기념의 전부는 아니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가 부단한 의미 확장과 현재화 노력을 통해 인류적 관심사로 거듭난 것처럼, 남영동도 당사자 중심의 기념에서 미래세대가 공감하는 기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억에는 ‘40년 법칙’이 작동한다. 아무리 중대한 사건도, 성인으로서 그것을 경험한 세대가 사라지면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취업 부담과 장래 불안을 호소하는 청년들은 슬프게도 과거에 대한 관심을 사치로 간주한다. 또 학생 인권과 성소수자 권리에 초점을 둔 이들의 인권 개념은 부모세대의 생각과 종종 불일치한다. 남영동의 의미가 세대에 맞게 번역돼야 하는 이유다. 한 세대의 사건 기억을 시대 초월의 문화적 기억으로 바꿔가려면 회고적 기념이 아니라, 전망을 제시하는 미래적 기념이 돼야 한다.
셋째, ‘세상에 없는 기념관’의 비전이 필요하다. 원형계단으로 대표되는 아우라 넘치는 대공분실이 모든 종류의 장애를 뛰어넘어 최고의 접근성을 갖춘 기념관이 됐으면 좋겠다. 또 언어의 제약도 넘어서야겠다. 온 세계의 사용자들이 유엔의 주요 언어로 소식과 자료를 올리고 내려받는 지구적 소통공간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역사 기반 민주인권교육의 허브로 말이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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