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지난해 이맘때쯤, ‘박근혜 시대가 두렵다’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고,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시대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은 정수장학회에 대한 그의 기자회견을 보고서였다. 그는 법원이 강탈로 판단한 정수장학회를 헌납이었다고 강변하면서 원소유주 김지태씨를 부정축재자라고 매도했다. 선거 과정에서 커다란 쟁점으로 등장한,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안에 대한 법원의 판결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니 5·16이나 유신에 대한 반성 등이 선거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변통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대통령에 된 이래 그 우려는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나 복지에 대한 공약은 이름만 남거나 사라져버렸다. 반면 박정희 복권 등을 위한 작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우선 유신헌법의 초안을 잡았던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돼 국정 전반을 조율하고 있고, 박정희 정권에서처럼 비밀정보기관이 정권의 보위대로 전면에 등장했다. 댓글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박근혜 정권과 국가정보원은 색깔론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비판세력을 위협했다. 또 댓글 사건을 소신껏 수사하도록 허용한 검찰총장은 뒷조사를 통해 만신창이를 만들어 내쫓고, 수사팀장 역시 국정원 직원을 체포했다는 이유로 밀어냈다. 이런 정권의 행태를 비판하는 인사들의 집 앞에선 복면을 한 이들이 험악한 문구의 손팻말을 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극우인사들을 은밀히 따로 만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스팔트 우파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것과 관련 없는지 모르겠다.
박정희와 유신을 재평가하는 작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자긍심의 역사를 부르짖으며 이승만·박정희의 재평가를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국사편찬위원장 등 관련 요직에 포진시키고 문제투성이의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도 검정에서 통과시켰다. 교육부는 나머지 7종의 교과서에 대한 수정명령을 통해 본격적으로 박 대통령의 기억투쟁을 지원할 태세다.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든 무리수의 배경에는 기억투쟁도 분명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제2의 새마을운동까지 제창하고 나섰다. 취임 8개월 만에 본색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다. 당명과 로고를 바꾸고, 입바른 인사들을 불러들여 뭔가 변화할 것처럼 했던 것은 국민들을 현혹하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위장막을 걷어내고 국가주의·성장주의·반공주의란 박정희 시대의 이념으로 회귀하는 박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유신의 부활, 권위주의의 부활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흐름을 저지하느냐다. 지난 8개월 동안 민주당을 위시한 야권의 대응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이를 민주화 딜레마로 설명했다. “국가가 탄압기구로 기능한 박정희 정권 아래선 국민들이 민주화운동에 큰 지지를 보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된 지금 민주주의는 일반 국민들에게 중요 의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내걸고 민주화운동 당시의 투쟁방식을 채택한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지 않는 한 야권의 대응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려면 국민들의 의식의 밑바닥을 깊이 들여다보고 국민이 원하는 야당의 모습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심층조사를 통해서 국민들이 가장 갈급하게 여기는 부분을 파악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국민과의 공감대를 마련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 특히 경제난과 양극화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난 서민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극우적 배설물인 일베에 환호하는 젊은층에서 보듯이, 그들의 분노와 좌절이야말로 권위주의의 토양이다. 야권이 서민층을 비롯한 국민과의 공감대를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새로운 권위주의 시대를 맞을 수 있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대독 담화’로 ‘댓글 정국’ 못 덮는다 [#185 성한용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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