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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교사로 근무했던 용정 명신여자중학교 교정에 서 있는 필자. 46년 5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해 몰래 월남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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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2-4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방이었으나 용정은 곧바로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한 중국 교회 청년 80명이 몽둥이를 들고 용정의 치안을 맡기도 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삼팔선이 그어져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비극이 시작됐다. 용정에 있던 기독교 청년들은 그동안 만주 정부에 빼앗겼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를 되찾기로 결의했다. 나는 장윤철 선생을 교장으로 모시고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명신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장윤철 선생은 은진 6회 졸업생으로 명신 재건을 주동했다. 서울에 와서는 대광중·고등학교 교감과 신일고등학교 교장으로 평생 청빈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얼떨결에 맡은 국어 과목이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농구와 탁구 코치로 학생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학교 합창대의 반주까지 맡아서 말하자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우리가 신나게 활동을 시작하자 용정에 잠복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자치단을 결성해 용정의 치안을 맡았다. 이들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예배를 금지하고 도덕 선생에게는 유물사관을 가르치라고 강요했다. 노래와 무용에 능한 여학생들을 공산주의 선전용으로 뽑아 가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이 거세지자 기독교 선생들은 하나 둘 남한으로 도피해 가고 말았다. 장윤철 선생도 이때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다가 결국은 사임하고 남쪽으로 피신을 한 것이었다. 45년 10월 초 아버지는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 총회에 갔다가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자 이승만을 만났다. 그 며칠 사이에 만주는 공산당 천지가 되었다. 소련군 사령부와 조선인 공산군이 들어오자 기독교인의 아이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춤을 추며 반겼다. 서울에서 용정으로 돌아오려는 아버지를 모두들 만류했으나 ‘간도를 사수하겠다’는 그의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10월12일, 용정시 공산당원들이 밤중에 뛰어들어 가택 수색을 하더니 아버지를 잡아갔다. 죄목은 아버지가 이승만과 내통을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때는 감옥살이를 영광으로 생각했던 어머니였지만 이번에는 ‘분통이 터진다’며 견딜 수 없어 하셨다. 그리고 사십 리나 되는 연길형무소를 이틀에 한번씩 찾아갔다. 학교에서 내 처지도 몹시 난처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포된 상태에서 나는 다른 교사들처럼 피신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기독교 선생이 되었고, 앞날이 불안했던 학생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공산당원들에게 유혹을 받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진심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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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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