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신학대학 유학 시절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료 학생들. 맨 오른쪽이 필자. 궁핍한 유학생활로 나는 방학 때면 주로 식당에서 풀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이런 격무로 하트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다가 폐병이 도져 생사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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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4-2
하트퍼드신학대학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는 1955년부터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예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한여름에는 ‘뉴잉글랜드로 나가는 선교사’(Missionary to New England)라는 장학금을 받아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미국의 고등학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일본 동경신학교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박봉랑도 이 즈음 미국 애즈버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신약성서 해석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조직신학을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결국 보스턴대학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그가 카를 바르트를 주제로 한 논문을 쓸 무렵 보스턴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는 기숙사 방에 앉아서 뉘엿뉘엿 해가 지도록 서로의 꿈을 나누었다. 나중에 우리 둘은 한국신학대에서 동료 교수로 같이 일했다. 용정의 은진중학교 시절부터 벗인 안병무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불트만 교수 밑에서 신약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둘 다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는데 그는 “우리 끝까지 결혼하지 말고 총각으로 살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다. 나는 편지를 보고 박장대소를 하며 “다른 건 몰라도 총각으로 살자는 약속은 못 하겠네”라고 답장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논문을 쓰면서 무리를 했는지 잔기침이 오랫동안 그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숙사 방에서 혼자 논문을 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침대에 기어 올라와 이불을 덮었는데 천장이 가뭄에 메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로 시커먼 거미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깨어나 보니 하트퍼드 종합병원이었다. 폐에 물이 찬 늑막염이었다. 의사는 아무래도 폐병 같다고 했다. 만주에서 폐병으로 죽은 학린 삼촌에게서 폐병을 옮은 게 뒤늦게 발병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구인 고든 스코빌 목사의 도움으로 코네티컷의 작은 요양원에서 6개월 정도 쉬면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통 입맛이 없었는데 피츠버그에서 공부하던 여동생 선희가 가져온 김치를 먹고는 입맛이 다시 살아났다. 폐병은 완쾌됐으나, 균 덩어리가 오른쪽 폐에 뭉쳐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서 바쁘게 살 사람인데 지금 수술을 해서 아예 깨끗하게 도려내자고 했다. 갈비뼈를 하나 잘라내고 오른쪽 폐의 윗부분을 잘라내는 대수술이었다. 모든 걸 다 무료로 해 주겠다는 말에 의사들을 믿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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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잡히자 그 다음에는 사흘 동안 잠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의사 중 한 사람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막걸리를 먹고 잠을 자더라며 나에게 술을 주기도 했다. “절 데려가시려면 깨끗이 데려가십시오. 왜 이렇게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하며 울부짖으며 기도를 하자, 나는 15분 정도 아주 달콤한 잠을 잤고 그 뒤부터 회복되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나에게 지옥의 문턱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왜 천국문이 아니고 지옥문이죠?” 그랬더니 “너무 고통스러워하시기에 ….” 그런데, 생사를 넘나드는 그 상황에서 내 마음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했다. 며칠 뒤 예일대에서 공부하던 장윤철 선생과 정대위 목사가 나를 문병와, 정말 반갑게 만났다. 그때 장윤철 선생은 종교교육 석사를, 정대위 목사는 박사학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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