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아내 해리엇 페이 핀치벡(왼쪽 두 번째)과 필자(오른쪽 두 번째)가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을 친구 박봉랑(맨 왼쪽)과 주례를 한 김재준(맨 오른쪽) 목사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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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5-1
1961년 봄 나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페이는 그해 여름 서울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에 자원봉사자로, 여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왔다.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한국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수유리에 있는 한신대 캠퍼스를 보여주고 가족에게 소개를 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며느리를 기다려왔는데 말도 안 통하는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며 서운해하셨다. 우리 둘은 김재준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하기도 했다. 목사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둘이 서로 사랑해?” 하고 물으셨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사랑하면 결혼하는 것이지”라고 툭 던지셨다. 그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한마디는 찌는 듯한 여름에 불어오는 한 자락 바람처럼 시원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페이에게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마지막 편지를 썼다. 사랑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결정을 내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곧 전보가 날아왔다. “지금 한국으로 떠납니다.” 나를 위해 태평양을 건너오기로 결심한 페이를 부산항으로 마중 나갔다. 61년 11월 하순이었다. 어머니는 “안경도 제 눈에 맞아야 한다는데 네가 좋으면 됐지” 하며 서양 며느리를 받아주신다는 뜻을 나에게 알렸다. 나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나라로 시집오기로 결정한 페이는 열등감으로 가득 찼던 나의 자아상을 완전히 새롭게 해 주었다. 우리는 김재준 목사님의 주례로 12월16일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준비 기간은 고작 2주밖에 없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친척들은 페이를 화장실로 끌고가 줄자로 몸을 쟀다. 웨딩드레스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 둘은 명동에 가서 결혼반지를 샀다. 동생 영환은 청첩장을 만들어 보냈다. 형수인 박용길 아주머님은 페이와 함께 시내에 나가 신혼여행 갈 때 입을 복숭아색 한복을 맞췄다. 결혼식 날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 모두들 눈이 오면 잘산다고 덕담을 해 주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결혼잔치를 간소하게 할 것을 법으로 발표해 우리는 손님들에게 식사 대신 케이크와 차를 대접했다. 그때 어머니가 사람들 앞에 나오시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게 아닌가! 며느리를 맞아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유명한 배우가 된 어린 조카 문성근은 그날 내가 페이와 키스하는 것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신혼여행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온양 온천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역에 가보니 차표가 다 팔렸다는 것이 아닌가. 지프차를 가지고 있던 유관우 형이 온양 온천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부모님에게 절을 하며 선물을 드려야 했다. 10년 미국 생활을 한 탓에 나는 그런 풍습을 잘 몰랐다. 페이는 가난한 나라로 시집을 온다면서 갖고 있는 귀중품과 옷들을 다 주변에 나눠주고 거의 빈손으로 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들어온 결혼선물 중에서 부모님께 드릴 만한 것을 골라서 선물로 드렸다.
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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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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