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유신체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내몰린 해직교수들은 모임을 만들어 동지애를 나누며 탄압을 견뎌냈다. 안병무 교수의 수유리 집에 모인 해직교수들, 왼쪽부터 백낙청·이문영, 한 사람 건너 리영희·안병무 교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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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5-7
1975년 월남이 공산화하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지금까지의 긴급조치 가운데 가장 살벌한 ‘긴조 9호’를 발동시켰다. 특히 이 9호에서는, 개헌논의 금지, 학생 정치 관여 불용, 그리고 경찰병력 교내 진입을 합법화하고 있었다. 4월10일에는 문교부에서 휴업령을 내려 전국의 모든 대학 교문이 굳게 닫혔다. 교직원 외에는 아무도 학교에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운동권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기세로 문교부는 우리 한신대 학생 10명의 제적과 함께 안병무와 나의 해임을 명령했다. ‘기장’을 대표하는 장로들과 총회장이 긴급 소집을 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증경(전임) 총회장과 강원룡 목사가 포함된 9인 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했다. 위원회에서는 폐교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교수들의 해임을 결정했다. 김정준 학장은 “우리에게 한신빌딩(충무로 위치)이 있어 자랑이었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이제 그 한신빌딩 때문에 우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면서 한탄했다. 빌딩에 대한 세무감사에 들어가면 그 여파로 폐교가 되고 모든 재산이 국가로 환수될 수도 있다는 재정적인 압박을 받은 것이었다. 당황한 이사회는 나와 안병무에게 사퇴서를 쓰라고 권했다. 사퇴서를 쓰면 나중에 복직하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직권고를 들은 우리는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내 한 몸 사리지 않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신학대학 교수에게 사퇴서를 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은 이를 분명히 거절했다. “정부의 지시에 항거할 수 없다면 우리를 해임하시오!” 결국 75년 6월12일 우리는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우리가 해직당하던 그즈음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운동을 뒤에서 조종한다는 이유로 이른바 ‘문제교수’들이 강제해임을 당했다. 백낙청(서울대), 김병걸(경기공전), 김찬국·서남동·성내운(연세대), 이문영·김용준(고려대), 이우정(서울여대), 노명식(경희대) 등이 비슷한 시기에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가 우리를 학교에서 쫓아냄으로써 오히려 더 골수 운동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교수들은 몰려다니면서 더 본격적인 반정부 활동을 모의하게 된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에서 서러움을 겪은 해직 교수들은 서로 끈끈한 동지애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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